1994년 LG 김선진의 아치와 2023년 KT 문상철의 포물선
프로야구 KT 위즈 내야수 문상철(32)의 부모님은 10여년 전부터 서울 잠실구장 인근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아들이 프로로 진출할 즈음 문을 열어 지금까지 경영 중이다.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이곳에는 문상철의 현역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유니폼과 사진 그리고 팬들의 응원문구가 빼곡히 벽면을 메우고 있다.
2014년 KT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문상철은 이듬해부터 종종 잠실구장에서 1군 경기를 소화했다. 부모님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식당 운영도 중요했지만, 잠시라도 틈을 내 잠실구장을 찾아 아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마음 편히 아들을 응원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창시절부터 거포 내야수로 주목받았던 문상철이 프로 무대에선 좀처럼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단 초기부터 기회는 많이 받았지만, 타석에만 서면 주눅이 들었다. 그러면서 ‘만년 유망주’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가 붙었다.
기회는 2020년 들어 찾아왔다. 앞서 1년 전 부임한 이강철 감독이 새롭게 기회를 주면서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또, 당시 한화 이글스에서 뛰던 김태균에게 타격폼을 전수받아 타석에서 효과를 보기도 했다.
마침내 1군에서 자리를 잡은 듯했던 시기. 그러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문상철은 다시 부진의 터널을 지나가야 했다. KT가 통합우승을 차지했던 2021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문상철의 이름은 없었다. 이강철 감독은 “대타 자원으로 넣고 싶어도 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했다.
2년 전 소속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TV로 지켜본 문상철이 마침내 가을야구 무대에서 포효했다. 문상철은 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2-2로 맞선 9회초 2사 1루에서 상대 마무리 고우석으로부터 좌월 결승 2루타를 터뜨렸다. 시속 133㎞짜리 커브를 제대로 받아쳐 장타로 연결했다. 발이 빠른 LG 좌익수 문성주가 끝까지 쫓았지만, 타구는 왼쪽 담장을 맞고 나왔고, 이 사이 1루 주자 배정대가 홈으로 들어왔다. 승기를 잡은 KT는 3-2 리드를 지켜 우승 확률 74.4%(39차례 중 29회)가 걸린 1차전 승리를 가져갔다.
문상철은 사실 이날 경기의 역적이 될 뻔했다. 1-2로 뒤진 2회 무사 1, 2루에서 기습적으로 번트를 댔는데 이 타구가 LG 포수 박동원 바로 앞으로 떨어져 삼중살로 연결됐다. 이후에도 연속 삼진으로 물러난 문상철은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한국시리즈 데뷔전에서 주인공이 됐다.
문상철은 “부모님께서 종종 구장을 찾아 응원을 해주신다. 아들로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그러지 못한 경기가 많아 죄송했다. 특히 2년 전 한국시리즈를 뛰지 못해 더욱 마음이 아팠다”면서 “부모님께서 오늘 경기는 오시지 않으셨다. TV로 보며 기뻐하셨을 생각을 하니 효도를 한 기분이다”고 웃었다.
이날 문상철이 그린 포물선은 자연스럽게 29년 전 한 선수의 아치를 떠올리게 한다. 1994년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 페넌트레이스 1위로 올라온 LG는 선발투수 이상훈과 차동철, 김용수가 11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냈다. 이와 맞선 태평양 돌핀스 역시 에이스 김홍집이 1회부터 10회까지 마운드를 지키면서 LG 타선을 1득점으로 잠재웠다.
팽팽하게 흘러가던 경기는 한 백업 선수의 홈런으로 막을 내렸다. LG의 만년 대타 김선진. 이날 6회 최훈재의 대주자로 나와 자리를 지키던 김선진은 1-1로 맞선 11회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으로 들어섰다. 이어 김홍집의 초구 슬라이더를 통타해 큼지막한 좌월 솔로포를 터뜨려 경기를 2-1로 끝냈다.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나온 끝내기 홈런이었다.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백업 요원의 끝내기 아치가 터지자 잠실구장은 LG팬들의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LG는 이 기세를 몰아 나머지 2~4차전을 싹쓸이해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다. 가장 중요했던 경기에서 활약한 김선진은 그해 가을의 영웅이자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역으로 남았다. 김선진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방출 1순위로 분류됐다. 그러나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던 한국시리즈에서 깜짝 활약을 펼치며 2000년까지 현역 생활을 연장했다.
29년이 흐른 뒤 나온 문상철의 이날 2루타는 김선진의 홈런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팽팽한 균형을 깬 결승타, 잠실벌의 왼쪽 상공을 가른 장타였다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둘 모두 학창시절까지는 유망주로 평가됐지만, 프로에선 좀처럼 빛을 보지 못한 점도 궤를 같이한다. 다만 차이라면 LG가 드라마의 주인공에서 이변의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
문상철과 김선진은 독특한 연결고리로도 묶여있다. 문상철이 어릴 적 야구를 시작했던 중대초 야구부의 감독이 바로 김선진이었다.
문상철은 “김선진 감독님의 1994년 활약상은 당연히 알고 있다. 사실 이번 한국시리즈 전까지는 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 경기가 끝난 뒤 떠올랐다”면서 “감독님의 결승포로 LG가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내 결승타를 앞세워 KT가 꼭 우승할 수 있도록 뛰겠다”고 다짐했다.
고봉준 기자 ko.b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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