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북클럽] 언어라는 기차를 타고 끝없이 떠나는 여행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얼마 전 마트를 가려다 길을 묻는 외국인을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는 남산을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냐며 핸드폰으로 찾은 경로 안내를 내게 내밀었다. 경로 안내 결과는 어쩐 일인지 잘못되어 있고, 한 번에 남산까지 가는 방편이 없어 그 모든 상황을 납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동양인이지만 생김새가 미세하게 달랐다. 한국말을 썼지만 말투는 어눌하고 아이들이 쓰는 반말체였다. 낯선 사람에게 듣는 반말, "왜 안돼?"라는 식의 되물음. 묘하게 불편했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한국말을 쓰려고 애쓰는 모습과 답답한 상황에서도 주의 깊게 내 답을 듣는 태도에 역으로 고마웠고.
관광지도 아닌 우리 동네에서 외국인을 만나다니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방증 같다. 하지만 이미 놀이터나 전철역에서 외국인을 종종 보아왔다. 그런데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외국인에게는 경계심이 앞선다. 익숙하지 않은 데다 다른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다.
▲ 언어라는 기차를 타고 끝없이 떠나는 여행 |
ⓒ 알라딘 |
다와다 요코의 소설 <별에 어른거리는>(정수윤 옮김, 은행나무)을 읽으며 느낀 즐거움이나 해방감은 '언어'를 넘나드는 주인공들 때문이다(<별에 어른거리는>은 작년에 출간된 <지구에 아로새겨진>(정수윤 옮김, 은행나무)에 이은 2편에 해당한다. 해당 작품은 'Hiruko 3부작'으로 일본의 문예지 <군조>에 연재 발표되었다).
그의 소설에는 출신 국가, 인종, 민족이 제각기 다른 친구들이 어울려 여행을 하고 가족이나 연인의 개념이 지금과 달라진 근 미래의 모습이 등장한다.
Hiruko는 북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외국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물에 잠겨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국의 행방을 알려줄 사람, 모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찾고자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우연히 해당 방송을 보고 흥미를 느낀 크누트가 모어를 찾아 떠나는 Hiruko의 여정에 동행하고 그 길에서 만나는 아카슈, 나누크, 노라, Susanoo를 통해 언어와 정체성의 의미를 묻는 것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다.
Hiruko가 크누트를 만나 모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은 1편에서 다루어졌다. Hiruko의 고향 사람이라는 기대로 Susanoo를 만나지만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실어증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그를 돕기 위해 다시 코펜하겐의 병원으로 떠난다. 그 과정과 병원에 모여 벌어지는 소동이 2편 <별에 어른거리는>에 펼쳐진다.
소멸한 나라에서 온 모어를 찾는 Hiruko, Hiruko에게 호감을 느끼는 언어 연구자 크누트,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살기로 한 인도 출신 아카슈, 길에 쓰러진 나누크를 돕다 연인이 된 노라, 에스키모인이지만 장학생으로 코펜하겐에 온 후 자신을 찾아 떠도는 나누크, 고향을 떠나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Hiruko를 만나게 된 Susanoo 등. 출신과 배경, 성격과 하는 일이 전부 다른 인물들이 우연히 연결되어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다 보면 과거의 내가 깎이고 떨어져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게 아닐까." (107쪽)
다양한 인물에게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저마다의 정체성에서 위기를 겪고 있거나 어떤 균열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 등장인물의 절반은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이나 망명을 해온 사람들이고. 소설에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지리적 여행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여성과 남성, 어떤 성향이나 취향, 관계나 역할 같은 정체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처럼 보인다.
각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사건에 휘말리고, 누군가를 만나는 과정은 정체성을 허물거나 변형시키면서 다시 만드는 일 같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 나누크와 베르마는 서로 "성격을 바꾸는" 실험을 하고 한밤을 질주하는 오토바이 여행을 통과하면서 노마와 아카슈는 자기 자신의 뜻밖의 면모를 발견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행'과 더불어 '언어'가 있다. 일본 태생이지만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독일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저자에게 이동과 언어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사람의 사고 체계와 세계관, 태도와 어투가 변하듯, 언어 자체는 정체성의 중요 요소이기도 하다.
소설 속 Hiruko는 스칸디나비아반도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판스카'를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모어를 쓸 때 Hiruko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는 영매 같지만 판스카를 쓸 때 그녀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미스터리한 여성 같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소통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다채로운 정체성을 갖는 일 아닐까.
그 외에도 소설에는 덴마크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인도어, 일본어까지 여러 언어가 등장하는데 독자인 우리는 그 모두를 한국말로 술술 읽을 수 있다. 그건 외국어라는 기차를 번거로움 없이 마음껏 갈아타며 홀가분하게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실제로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지리적 정신적 경계가 얼마나 확장될까 상상하게 되고. 마침내 외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까지 한다.
여러 개의 문을 품은 미래
이 소설은 깔끔하게 접합된 하나의 답이나 결말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내게는 알려진 답을 지우며 질문을 연결해가는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미로에 미로를 덧대며 무한히 문을 그려가는 이야기.
문 하나를 열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여러 개의 문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우리의 미래가 그랬으면 좋겠다.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라는 단순한 답이 아니라 누구도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어떤 미래가 있다고.
다와다 요코의 상상을 타고 그중 하나의 문을 열어 보았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든 그저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친구가 되는 세계. 연인이 반드시 성적인 관계를 기본으로 하지 않고 가족이 혈연관계로만 맺어지지 않는, 고향이 나고 자란 곳으로 한정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언어만 고집하지 않는 세계.
"먼 여행을 떠난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오늘이 우리 모두에게 두 번째 생일이지." (356쪽)
낡은 관념을 허물고 생각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상상이 재미있고 유쾌하다. Hiruko가 되었다 아카슈가 되기도, 나누크가 되기도 하면서, 나와 타인, 그리고 지구까지, 서로를 보살피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끝없이 떠나는 세계여행 중. 이야기의 종착지인 3부가 어디에 닿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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