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믿음직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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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이 사진은 로버트 마스라는 사진가가 1989년 12월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 마을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은 '아기와 어머니의 시신을 보며 울고 있는 아버지'라는 내용으로 보도됐다.
진실을 가장 극적으로 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던 사진이 믿음직한 거짓말로 둔갑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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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다. 가죽점퍼를 입은 중년의 남성이 길바닥에 가지런히 누운 시신들 사이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장면이다. 사내는 한 여성의 주검 위에 놓인 갓난아기의 시신에 오른손을 갖다 댄 채 왼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이 사진은 로버트 마스라는 사진가가 1989년 12월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 마을에서 찍은 것이다. 마을은 차우셰스쿠 정권에 항거해 가장 먼저 민중 봉기가 일어난 곳이었다. 독재 정권은 성난 민중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티미쇼아라 마을에서만 수천 명이 스러졌다. 전 세계에서 모인 기자들은 민중들이 이끈 곳에서 문제의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은 ‘아기와 어머니의 시신을 보며 울고 있는 아버지’라는 내용으로 보도됐다.
충격적이게도 이는 조작된 사진이었다. 봉기 주도자들은 차우셰스쿠 정권의 악랄함을 알리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파헤친 시신을 독재 정권에 학살된 피해자라고 알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머니로 알려진 여성은 간경화로, 갓난아이는 식중독으로 돌연사했다고 한다. 물론 가죽점퍼의 사내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었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학살극이 사실이라 해도 조작된 사진마저 진실이 될 수는 없었다. 이 사진은 20세기 대중 매체의 역사에서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조작 사례로 남았다.
진실을 가장 극적으로 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던 사진이 믿음직한 거짓말로 둔갑해버린 셈이다. 사진의 진실성을 둘러싼 논쟁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소셜미디어 열풍이 불면서 더욱 빈번하고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인스타그램에 ‘공격받는 가자(Gaza_under_attack)’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올라온 사진 한 장이 이스라엘 비난 여론을 부추겼다. 잿더미가 된 건물 앞에서 하얀색 재를 얼굴에 뒤집어쓴 아버지가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 나오는 모습이었다. 갓난아이는 왼팔에 안겼고 세 아이는 아버지의 등 뒤에 업혀 있다. 마지막 아이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걸어 나오고 있다. 무고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의 희생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진이었다. 이는 페이스북과 엑스 등에 올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사진 또한 가짜다. 자세히 보면 아이들의 팔이 이상하게 꼬여 있거나 발이 비상식적으로 길게 돼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 등 뒤의 세 아이가 자신의 힘만으로 매달리는 괴력을 가졌을 리 만무하다.
이제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더해지니 동영상조차 손쉽게 조작된다. 얼마 전에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등장하는 가짜 영상이 나와 논란이 됐다. 일본 유명 뉴스 프로그램의 로고가 적힌 영상 속에서 기시다 총리는 부적절한 발언을 퍼붓는다. 영상은 엑스에 오른 지 하루 만에 232만회 이상 조회됐는데 얼굴에 음성까지 AI로 정교하게 제작됐으니 얼마든지 가짜 영상이 여론 조작에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스마트폰 시대를 지나 숏폼 전성시대다. 코로나로 촉발된 비대면 문화와 디지털 기술이 맞물리면서 쇼츠와 릴스, 틱톡, 바이트, 쿼비 등 1분 이내 짧고 강렬한 영상이 인터넷을 점령했다. 초 단위의 콘텐츠가 범람하면서 믿음직한 거짓 콘텐츠가 판을 친다.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출처와 저자를 따져보고 크로스 체크해 근거가 확실한지 판단하면 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내년부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교에서 SNS 등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뉴스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치기로 했다고 한다. 잘못된 정보는 기후변화에서부터 백신과 전쟁 등의 사안에까지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올 수 있는 만큼 우리도 이를 따라 하면 좋겠다.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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