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물가 ‘밀착마크’ 시즌2

김기환 2023. 11. 8.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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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환 경제부 기자

정부 부처 직제표에 없는 신설 보직이 등장했다. 가칭 농림축산식품부 ‘라면 과장’, 해양수산부 ‘고등어 과장’, 산업통상자원부 ‘휘발유 과장’ 식이다. 품목별 물가상승률을 관리하는 게 주요 임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지난 2일 주재한 물가관계장관회의에서 “범부처 특별 물가 안정체계를 즉시 가동하겠다. 각 부처 차관이 물가 안정 책임관이 될 것”이라고 말한 직후다.

전담 공무원이 밀착 마크할 정도로 물가 상황판에 불이 붙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10월 물가는 1년 전보다 3.8% 올랐다. 지난 3월(4.2%) 이후 7개월 만에 가장 높다. 올해 10월까지 누적 물가 상승률은 3.7%. 기획재정부가 내건 올해 물가 목표치(3.3%) 달성은 사실상 어려워졌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물가만큼 민감한 소재도 없다.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이 2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수산물 물가를 점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물가관리 책임 실명제’를 도입했다. 52개 생활필수품을 지정해 개별 공무원에게 물가 상승의 책임을 물었다. 현 정부와 비슷한 방식이다. 때려서 잡히면 다행이지만, 끝은 좋지 못했다. 당장은 물가가 내렸을지 몰라도 나중에 한꺼번에 튀어 오르는 부작용이 생겼다. 시장의 수요-공급 원리를 무시한 채 인위적으로 물가를 억누른 결과다. 경제기획원(옛 기재부) 물가정책국장을 거쳐 재무부 장관(1982~1983년), 경제부총리(1997년)를 지낸 강경식 전 부총리의 회고다.

“과잣값을 잡으려고 했더니 양을 줄이고, 소줏값을 잡으려고 했더니 알코올 도수를 내리더라. 물가가 3%대로 안정됐다는 통계는 정확히 말해 ‘물가지수’가 3%대인 것이다. 정부 물가 잡기는 딱 거기까지가 한계다.”

강 전 부총리의 우려가 현실이 될 조짐이 보인다. 식품업계가 최근 가격은 그대로 둔 채 중량을 기존 5g에서 4.5g으로 줄인 조미 김, 과즙 함량을 100%→80%로 낮춘 오렌지 주스, 개수를 기존보다 2개 뺀 냉동 만두를 출시했다. 줄어든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에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더한 슈링크플레이션 현상이다. 가격 인상에 따른 소비자 저항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고물가 원인은 복합적이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전 세계에 뿌린 현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원자잿값 폭등, 미·중 패권경쟁이 부른 공급망 붕괴…. ‘뉴노멀(새 기준)’이 된 고물가 시대에 연착륙해야 한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1980년대 경제기획원 시절 잇따라 물가총괄과 사무관으로 일한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이나 추경호 부총리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물가는 잡는 게 아니라, 잘 하다 보면 잡히는 것이라는 걸.

김기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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