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잇다' 시리즈의 세 번째 책 [백룸]의 작가를 만나다

2023. 11.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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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사에 충분히 기록되지 못한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한국 문학을 새롭게 바라보는 ‘소설, 잇다’ 시리즈의 세 번째 책 <백룸> 은 2023년의 작가 천희란과 1930년대 작가 이선희를 조명한다. 시공간을 초월해 활자에서 조우한 두 여성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된 지금, 이 세상에 대하여.

Q :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를 잇는 프로젝트 소설, 〈백룸〉으로 1930년대의 이선희 작가와 특별한 조우를 했습니다. 작가님의 새 단편소설 〈백룸〉과 이선희 작가의 작품이 나란히 실린 결과물을 받아본 소감은 어떤가요?

A : 〈백룸〉을 구상하고 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제 작품과 에세이를 통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동시에, 그 작품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 이야기를 써야 했으니까요. 그간 현실의 사건이나 논란이 되는 이슈를 작품에 직접적으로 쓰지 않는 편이어서 제게는 낯선 작업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책을 받아본 후 제 글쓰기의 저변을 확장하면서도 이선희 작가 작품의 현재적 의미를 소개하고 싶었던 처음 목표에 조금은 다가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 〈백룸〉은 어디에서 시작한 이야기인가요?

A : 세계적인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은 비단 여성의 인권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퀴어, 장애, 질병,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합해 확장하고 있어요. 저는 규범화된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경직시키고, 페미니즘이 보수적인 이념과 결합해 새로운 소외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과거보다 여성 인권이 증진된 사회를 살아가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좌절 또한 있어요. 근대의 신여성이 경험하는 좌절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런 점에 집중하며 이선희 작가의 소설을 읽었죠. 전 이선희 작가가 가시적인 진보 뒤에 잠복해 있는 함정을 날카롭게 묘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반복되는 함정을 맞닥뜨리는 여성들의 삶이 ‘백룸’에 비유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Q : 〈백룸〉에는 게임 유튜버인 레즈비언 주인공이 화자로 등장합니다. 왜 이 인물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나요?

A : 꽤 오랫동안 게임은 남성들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죠. 레즈비언은 게이나 트랜스젠더에 비해 비가시화된 퀴어였고요. 몇 년 전 길게 입원할 일이 있어 병원에서 유튜브만 보며 시간을 보낸 적 있는데, 유튜브는 광활한 세계더라고요. 개인이 자신만의 채널을 통해 전통적인 매체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들을 가시화할 수 있도록 만든 플랫폼이었죠. 여성 게이머나 레즈비언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도 보게 됐는데, 그 모습에 1930년대의 신여성들이 겹쳐 보였던 것 같습니다.

Q : 〈백룸〉에 소개된 이선희 작가의 단편소설 〈계산서〉와 〈여인 명령〉에는 각각 사고로 다리가 절단된 후 보상으로 남편의 목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인공과 대학생, 백화점 점원, 술집 여급 등 여러 번 변화와 몰락을 경험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선희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작가님은 어떤 연대 혹은 힘을 느꼈나요?

A : 작품을 통해 만난 이선희 작가는 지적이기도 하지만, 무척 도전적인 여성이었어요. 비단 한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절망만을 날카롭게 그려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이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동하며 변화하는 여성을 그려냈죠. 어쩌면 계속해서 새로운 지옥을 찾아 걸어가는 것, 그건 이선희 작가가 여성이기에 표현할 수 있었던 위대한 인간성이기도 하죠.

Q : 작가님 역시 그동안 어머니와 딸의 관계,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여성 인물을 그려왔습니다. 여성 서사를 쓰는 건 왜 중요할까요?

A : 이제 여성 서사는 여성들만의 임파워링을 위해 존재하지 않아요. 여성이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 출발한 질문들은 인류에게 새로운 보편을 고민하게 만들죠. 뛰어난 페미니즘 작품이 페미니즘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상찬은 폐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뛰어난 페미니즘 작품은 과거에 합의됐던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전복합니다. 다양해지는 여성 서사 작품을 보며 전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거스를 수 없는 변화가 시작됐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오히려 과격해진 혐오와 백래시(사회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성 서사를 쓰는 모든 창작자의 존재를 든든하게 여기다가도, 연대라는 단어가 다양한 입장이나 태도의 차이를 은폐하는 것을 경계하게 돼요. 하지만 그런 고민들을 통해 여성 작가로서 가진 의식도 정교하게 벼리고, 또 성숙해질 거라 믿어요.

Q : 작품을 읽으며 〈백룸〉의 ‘나’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세계인 ‘백룸’이라는 공간은 〈계산서〉와 〈여인 명령〉의 화자, 나아가 현대 여성들이 처한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 속 ‘백룸’이라는 공간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어땠나요?

A : 보통의 탈출 게임이 아닌 ‘백룸’이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가져온 이유가 있었어요. 일상적이지만 익숙한 기호나 표상이 존재하지 않고, 출구가 있다 해도 새로운 백룸으로 연결돼요. 백룸 내부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상상하면 답도 없는 공포일 뿐이죠. 그런데 전 이 절망적인 경험을 문학을 통해 비판적으로 부감하는 경험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완전한 출구는 없다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하죠.

Q : 백룸>을 쓰며 특히 중점을 두고자 한 점은 무엇이었나요?

A : 〈백룸〉은 여러 겹의 레이어를 가지고 있어요. 이상화된 퀴어, 세대 간 연애, SNS를 통한 ‘성폭력 말하기 운동’ 같은 것들이죠. 저는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가치 판단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그 모든 요소가 독자들에게나 저 스스로에게 질문이 되기를 바랐어요.

Q : 이쯤에서 다시 한번 복기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면요?

A : “이길 수 없는 싸움에도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지.” 소설에서는 긍정적으로만 해석되지 않는 대사지만,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살고 싶어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나서는 사람이 많아지면 패러다임 자체가 변할 테니까요.

Q : 어떤 것을 보고 느낄 때 글을 쓰고 싶어지나요?

A : 단순히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라면, 압도적인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자주 생기는 것 같아요. 책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할 것 없이요. 그것들이 주는 충격이나 떨림으로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이 들 때인데, 그럴 때면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돼요.

Q : 작가로서 체감하는 이 시대 소설이 가진 힘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 누군가에 의해 이미 해석되고 요약된 지식과 정보를 스스로의 앎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세상이 된 듯해요. 삶에 대한 지혜나 깨달음도 쉽게 구하게 되고요. 소설은 쉽게 휘발되는 앎에 저항할 수 있는 장르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타인이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을 경험하게 만들고, 그걸 읽는 동안 그 삶에 동의하거나 반발하며 싸우게 되죠. 제게 소설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사유를 일깨우고, 우리의 삶이 함부로 요약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Q : 지금 이 순간에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일지라도 위험을 무릅쓰며 맞서는 여성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나요?

A : 현재라는 연옥에 갇혀 있지 않고, 새로운 지옥을 걸으려는 여성들의 지성과 용기를 존경합니다. 부디 무사히, 다음의 지옥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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