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도 되나?” 여의도·목동서 커지는 의심···전문성+속도가 장점이라던 신탁 재건축
신탁 방식으로 재건축을 추진 중인 단지에서 잡음이 커지고 있다. 신탁사의 전문성을 앞세워 정비사업 조합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최근 이들 단지에서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있어서다.
신탁 방식이란 전문성을 갖춘 신탁사가 조합 대신 사업 시행을 맡아 사업 전반을 관리하고 일을 추진하는 것을 말한다. 대신 조합은 신탁사에 분양대금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를 낸다. 2016년 신탁사들의 정비사업 진출이 허용됐을 때만 해도 수수료가 최대 4%에 달했다. 그러나 최근 수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수료가 1% 후반대까지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탁 재건축은 조합보다 투명한 관리가 가능하다는 점, 조합과 시공사 혹은 조합 내분에 따른 공사 지연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조합이 재건축을 직접 추진할 경우 주택 소유주로 구성된 조합이 임원진을 꾸리고 시공사 선정과 각종 인허가, 분양 등 모든 절차를 맡아 진행한다. 즉, 입주민이 모든 사업을 알아서 해야 하는 구조다. 사업비만 수조원에 달하는데 소위 ‘동네 주민’으로 구성된 비전문가들이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도 적잖았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사업 형태가 바로 신탁 방식이다. 신탁사를 시행사로 지정하려면 단지 전체 소유주의 75% 이상 동의와 동별 소유주의 50% 이상 동의를 확보하고 토지 면적의 3분의 1 이상을 신탁해야 한다.
신탁사가 시행을 대신 맡아줄 때 생기는 장점은 많다.
우선 사업 초기 단계부터 안정적인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신탁사가 자체 신용도를 기반으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을 통해 금융회사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금력이 충분하지 않은 조합 입장에서는 신탁사를 통해 사업비를 조달할 수도 있다.
신탁 재건축의 또 다른 큰 장점은 바로 사업 속도가 빠르다는 점. 신탁사가 시행을 맡으면 조합을 설립하지 않아도 돼 추진위원회 구성에서 조합설립인가까지 소요되는 2~4년가량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각종 비리가 끊이지 않는 조합 방식보다 투명하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런 신탁 재건축은 여의도, 목동 주요 단지들이 줄줄이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됐다.
업계에 따르면 신탁 방식으로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사업장은 전국에 40여곳으로 파악된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재건축을 추진하는 16개 단지 중 7곳, 양천구 목동 14개 단지 중 4곳이 신탁 방식으로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목동7단지도 신탁 방식 두고 갈등
그러나 사업 속도가 빠르다는 기대와 달리 실제 신탁 재건축 현장에서는 신탁사의 위법, 사업 진행 방식에 따른 소유자 간 대립 등 잡음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서울 여의도에서는 10월 중 시공사 선정을 추진해 속도를 내려던 한양아파트 정비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서울시는 최근 영등포구청에 한양아파트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정비계획 위반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정비사업 진행 과정에 위법 소지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서울시는 “KB부동산신탁이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사업 시행자 권한이 없는 부지인 상가 부지를 사업 면적에 포함했다”며 시정을 권고했다.
여의도 한양상가는 소유주가 1명(롯데슈퍼)으로 KB부동산신탁을 재건축 사업 시행자로 선정하는 데 동의하지 않은 바 있다. 이에 한양상가는 제외된 상태로 KB부동산신탁이 지난해 8월 아파트 재건축 사업 시행자로 지정 고시됐다. 그런데 KB부동산신탁은 시공사 선정을 위한 입찰 공고를 내면서 동의를 받지 못한 상가를 구역에 포함시켰다. 정비계획 내용을 따르지 않은 채 시공사 입찰을 공고한 점도 문제가 됐다. KB부동산신탁이 정비계획의 확정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시공사 선정부터 나섰으며, 현재 제3종일반주거지역인 한양아파트를 ‘일반상업지역’으로 용도지역 상향이 될 수 있다는 전제로 시공사 입찰 공고를 냈다는 게 핵심이다.
어쨌든 서울시가 정비사업을 멈춰 세우면서 당초 10월 29일 예정이었던 시공사 선정 총회는 연기됐다. 또한 KB부동산신탁이 향후 추진 계획에 대해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서 사업 일정은 더 지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후 목동에서도 신탁 재건축을 두고 잡음이 일었다. 지난 10월 24일 코람코자산신탁이 목동신시가지7단지 정비사업추진준비위원회(정추위)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신탁 방식 정비사업 예비 신탁사로 선정됐다고 밝혔는데,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목동7단지 재건축준비위원회(재준위)가 “신탁 방식 도입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
재준위는 사업 방식 결정에 대한 투표를 하지 않는 등 소유주와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신탁사를 선정한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지성진 재준위원장은 “재준위는 신통기획 자문 방식으로 정비구역 지정 입안 제안을 진행하고 있고, 950가구 소유주들이 인정한 공식 재건축준비위원회”라며 “정추위가 주장하는 신탁 방식은 소유주들과 논의하지 않은 사안으로 향후 투표 절차를 통해 사업 방식을 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신탁사를 선정할 수 있는 주체와 선정 시기 등에 대한 법적·제도적 기준이 없다 보니 발생한 문제”라고 진단한다.
무엇보다 성공 사례가 많지 않은 것도 신탁 재건축의 약점으로 꼽힌다. 시장에는 신탁 방식으로 재건축을 추진 중인 곳이 많지만 아직 이 방식으로 준공까지 간 사례가 없다. 이런 불안감 때문에 한국토지신탁과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던 서초구 ‘방배삼호’는 올 2월 조합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방배7구역과 잠원동 ‘신반포4차’도 이전부터 신탁 방식을 추진했지만 주민 반발 등으로 조합 방식으로 돌아섰다. 다만 이 대목에서 신탁 계약을 해지하려 해도 명시된 조항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수탁자, 즉 소유자의 동의를 받는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계약서상 수탁자 전원 동의 또는 토지등소유자 80%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 등을 해제 요건으로 명시해놓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신탁 계약서·시행규정 표준안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나마 최근 국토교통부가 신탁 계약서·시행규정 표준안을 마련하면서 해지가 한결 쉬워지기는 했다. 국토부가 발표한 표준안에 따르면 신탁 계약을 체결한 주민 전체가 계약을 해지하지 않더라도 신탁사가 계약 후 2년 내 사업 시행자로 지정되지 못하거나, 주민 4분의 3 이상이 찬성할 경우 신탁 계약을 일괄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3호 (2023.11.08~2023.11.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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