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검사 받고 온 뒤 2시간... 남의 속도 모르는 사람들

김상목 2023. 11. 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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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김상목 기자]

 영화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 포스터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인용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인용에 의지하는 것은 자칫 영화에 대한 판단을 모범답안화하는 경로가 될 위험성을 짙게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언급하지 않고 이미지와 상황 중심의 본 작품을 온전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것과 논하는 것은 상당히 상이한 결로 나눠지는 사안이 될 수 있겠다.
 
실존의 위기에 처한 '주희'가 선보이는 평범한 오후

40대 중년 여성인 '주희'는 지방의 사립대학교 연극과 교수다. 그가 방문한 병원에서 가슴에 불규칙한 종양이 발견된다. 담당의사는 1/10 확률로 암일 수 있다며, 하지만 9/10은 치유 가능하니 너무 걱정 말고 일단 조직검사부터 해보자고 권한다. 검사 결과는 1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놀란 가슴 억누르며 주희는 검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간다. 연구실에 도착한 시간은 5시. 그로부터 2시간 동안 주희는 여러 사람을 만나가며 연구실을 정리하는 과정에 돌입한다.

처음 연구실 문을 두드린 건 늦깎이로 연극과에 도전한 만학도 '지유'다. 이제 졸업을 앞둔 지유는 은사에게 인사 겸 상담 겸 겸사겸사 들른 듯하다. 원래 요리사였다는 지유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용기를 내어 연극의 문을 두드렸지만 당장 먹고 살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주희는 그런 지유를 격려하며 현실적인 조언을 전한다. 사제지간의 면담은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오며 가며 볼 일 많은 무용과 교수의 별 내용 없는 전화를 응대한 뒤 잠깐 연구실 밖으로 나왔더니 무용과 교수가 맞은편에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떠맡은 학교 업무 때문에 푸념하며 주희에게 하소연하듯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는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에는 무관심하면서도 타인이 자신을 무시하면 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타입으로 보인다. 동료 교수인 주희에게도 자기 이야기만 떠벌이면서 중간 중간 통화할 건 다 한다. 예의바르게 응대하는 주희의 캐릭터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10년간 교수로 재직해 온 주희가 어떻게 학내 파벌과 입소문을 딛고 견뎌왔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해설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처음 면담했던 애제자와는 상반되는, 요즘 온라인 공간 여기저기에서 복제 양산되는 자극적 카피들, 흔히 접하게 되는 '세상에 이런 일이?' 급까지는 아니지만 성적이의신청을 하러 온 졸업반 남학생의 무리한 요구에도 주희는 차근차근 대화를 통해 성적 처리의 정합성을 설득하려 애쓴다(이 과정에서 실제 교편을 잡고 있는 장건재 감독의 고뇌가 살짝 엿보이기도 한다). 차례로 논파되는 자신의 알리바이에도 불구하고 계속 무의미하게 핑계를 들먹이다 끝내 꿀 먹은 곰처럼 할 말을 잃고 마는 남학생 역 배우의 생활연기가 돋보인다.

따로 떼어 보면 평범한, 하지만 합치면 이색적인 장면들
 
 영화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그렇게 (남의 속도 모르고) 주인공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의 대화와 업무처리 과정을 통해 대충 주희라는 인물이 관객들에게 각인되는 순간 화면은 갑자기 전환되어 어느 소극장으로 바뀐다. 그곳에는 배우를 다그치는 (다소 설정에 고정화된 캐릭터인) 공연 연출이 있다. 그는 배우를 몰아붙이며 추상적인 연기를 거듭 주문한다. 보다 못한 극단 선배가 연출을 힐난하며 진화하기 전까지는 멈출 기색이 없다. 나중에 보니 요즘 세대 시선으로는 '꼰대' 소리 듣기 딱인 극단의 연출가는 바로 주희의 남편 '호진'이다.

호진의 캐릭터는 마치 한 세대 전, 평범한 삶 대신 문화예술이나 사회운동을 선택한 이들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과거엔 적지 않은 이들이 그랬다. 커플 중 한 명은 함께 하던 활동을 생계 때문에 정리하고 생업을 찾고, 다른 한 명은 하고 싶은 걸 상대방의 동의 혹은 합의에 의지해 계속 이어나가는 우리 주변의 익숙한 유형이다. 그는 배우를 몰아붙이는 게 연출의 판단이라 이야기하지만 주변에선 연극의 설정이 마치 연출인 호진과 그의 아내이자 예전 동료였던 주희 사이의 관계를 극화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수군거린다.

이번에는 주희도 호진도 아닌, 아마 주희의 제자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두 여학생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뭔가 속에 맺힌 게 가득해 보이는 '은정'은 친구와의 만남 후 주희의 연구실 문을 두드린다. 은사였던 주희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은정은 가슴 속 묻어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간절히 하고 싶었고, 그 상대로 주희를 어렵게 택한 것처럼 보인다. 연애와 결혼에 대해 인생선배의 진솔한 조언을 청하는 제자에게 주희는 곤혹스런 표정을 살짝 짓지만 흉중에 품은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해준다. 은정은 감사해하며 떠나지만 주희의 표정은 후련한 듯도 심란해 보이기도 하다. 한 길 사람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법이다. 탁구공이 코트 양측을 오가듯 화면은 주희의 연구실과 호진이 머무는 소극장을 10분 전후 간격으로 오간다.

몽환적 연출 통해 오히려 일상을 환기하는 실험정신
 
 영화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주희에겐 어린 딸 '하영'이 있지만 학교 일로 늘 바쁜 주희는 딸의 돌봄을 자신의 엄마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남편은 이미 앞서 보였듯이 극단에 스스로를 감금하듯 갇혀 있다. 어쩌면 둘은 별거중일지도 모르겠다(나중에 극단 배우들 간의 대화를 통해 둘이 결별했다는 게 확인된다).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갈 것 같은 오후의 시간이지만 영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화면 속 시계-실제 러닝타임이 중첩되는 가운데 이야기는 중반부를 경유해나간다.

조금 늦지만 집에 들어가겠다는 약속을 딸에게 하지만 친정엄마에게는 얼른 재워달라고 당부하는 주희의 사소한 거짓말을 확인했던 관객에게 느닷없는 전개가 닥친다. 주희의 엄마와 딸 하영이 연구실로 찾아온 것이다. 하영이가 하도 엄마를 찾는 바람에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멀리 학교까지 온 것이다. 하영은 그리운 엄마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이 들고 모녀는 오랜만에 마음 속 품었던 대화를 나눈다. 부모님 말씀 그때 잘 들을 걸 하며 한탄 겸 사과하는 딸과 그때는 자신이 모질었다며 대거리해주는 엄마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저 훈훈하게 듣기엔 도입부에서 관객이 이미 알게 된 정보 때문에 썩 개운치는 못하다.

화면은 다시 고단한 연습 끝에 첫 공연이 매진이라는, 아마 모든 극단 관계자들이 꿈꾸는 순간을 선사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어린 딸이 자신의 품에서 고이 잠드는 찰나도, 매진의 감격도 (영화 속 시간이 이행되면서 마땅히 맞이했을 법한) '매직 아워'에 깃드는 작은 환상처럼 꿈이었다. 연구실에서 꾸벅 졸던 주희에게, 그리고 무대 뒤 대기실에서 역시 선잠에 빠진 호진에게 누군가가 찾아와 단꿈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위대한 누벨바그 고전에 대한 헌사에서 출발해 독자적 길로
 
 영화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과연 주희와 호진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는 극적 서사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저것 분석할 순 있지만 텍스트로 본 작품에 대해 결말부를 언급하지 않고 풀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아마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감독이 사전에 풀어내는 제목에 얽힌 유래와 주희 역할을 맡은 김주령 배우와의 인연에 망망대해 표류 중에 만난 부목이나 구명조끼처럼 매달리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 것이다.

2022년에 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는 명백히 아네스 바르다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62년 영화 < 5시부터 7시까지의 끌레오 >의 영향 아래 있다. 바르다의 영화에서 도입부를 장식하는 형형색색의 타로카드와 그를 통해 점쳐지는 끌레오의 미래가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에서는 살풍경한 엑스레이 검사결과로 대체되고, 끌레오가 6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주희는 불안한 가운데 뭘 하기도 그렇고 놓기도 난감한 오후 5시부터 7시까지의 두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만 20대 젊은 배우인 끌레오가 좌충우돌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며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다 낯선 만남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40대 중반의 나름대로 이것저것 겪어본 대학교수 주희로 옮겨지면서 좀 더 차분하고 성찰적인 풍경으로 바뀌는데, 그 지점에서 캐릭터의 조건 변화에 따른 차이가 제법 나는 셈이다. 그래서 본 작품의 홍보자료에서 빠짐 없이 바르다의 고전이 언급되긴 하지만 < 5시부터 7시까지의 끌레오 >가 제목과 도입부 및 기본전개 외에는 생각보다 결정적 영향력을 갖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대목에서 두 번째 지분을 주장할 작품은 장건재 감독의 2012년 작품 <잠 못 드는 밤>이 되겠다. 주희 역을 맡은 김주령 배우가 10년 전 영화에선 30대 초반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플로 등장해 연애와 결혼의 차이를 깨달아가는 이야기다. 배우의 연결성과 극중 연령대 설정 때문에 해당 작품과 이번 신작이 연작은 아닐지언정, 특정 캐릭터의 연대기처럼 읽혀지는 것 또한 일정부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본 작품에 지분을 요구할 다른 작업이 엿보인다. 바로 무주를 배경으로 김종관 감독과 옴니버스 형태로 각자의 중편을 제작해 장편으로 개봉했던 2020년 작품 <달이 지는 밤>이다.

해당 작품에선 다른 감독과 동일한 공간(무주)을 배경으로 각자의 작업을 수행한 뒤 마지막에 만나도록 하는 연출을 선보였던 장건재 감독은 이번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병행 진행되다 막바지에 연결되는 작업을 본인 혼자 수행해낸다. 즉 주희와 호진의 이야기는 온전하게 별개로 촬영되었고 전혀 촬영 내내 서로의 진행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 점에서 영화제 공개 버전과 극장 개봉 버전의 상이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 도전적인 형식 실험을 통해 바르다의 영화에서 출발해 장건재 감독 본인만의 고유한 비전을 완성하려는 작가적 욕망이 두드러지는 작업이다.

한국영화 위기에 대한 작은 영화들의 응전기록
 
 영화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누군가는 바르다의 작업에 대한 오마주 성격이 더 짙었다면 할 테고, 누군가는 코로나19 시기에 기분전환 겸 가볍게 만든 영화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 부담스럽기도 할 테다. 바르다의 영화가 도입부만 컬러고 이후 끝까지 흑백으로 이어지면서 끌레오의 시간 순서로 진행되는 반면,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으로 달리다 끝에 합일되며 마지막에 컬러 부분이 등장한다. 그리고 초반에는 완벽하게 분리되었던 주희와 호진의 시공간이 후반부 각자의 꿈 대목에선 조금씩 침입하기 시작하고 극장 개봉버전 결말부에서 온전히 통합되는데 여기에 극중극 미니버전까지 추가되기에 생각보다 난이도가 제법 있는 편이다.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의 출발은 감독이 인터뷰나 보도자료 등에서 밝힌 것처럼 코로나19 때문에 원래 계획했던 작업이나 본인이 몸담은 학사 일정이 중단된 틈을 타 가벼운 마음으로 이것저것 어깨 가볍게 시도한 결실이 분명하다. 하지만 스태프보다 (친분과 관계 등으로 대거 기꺼이 함께 했을) 배우가 늘 현장에 더 많았던 터라 안 해본 역할 바꿔가며 즐겁고 편하게 만들었다는 제작후기와 결과물에 투영된 작가적 야망은 꽤 차이가 큰 편이다. 미니멀한 제작환경이지만 제법 도전적 요소가 많은 작업이다.

모두가 한국영화가 위기라고 염려한다. 여러 지표를 봐도 틀림없어 보인다. 특히 상업영화 흥행부진은 돌파구가 엿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어야 할 블록버스터의 빈자리를 메우는 소소한 작은 영화들의 존재는 색다른 즐거움이자 발견의 기회이기도 하다. 굳이 의무감으로 한국영화 살려야 한다고 읍소하기 전에 극장가 곳곳에서 포착되는 흥미로운 작은 영화들부터 조명해보면 어떨까? 그런 마음으로 이 영화 곳곳에 감춰진 숨은 그림을 보물찾기하듯 탐험해보자. 해답 없는 근심걱정보다는 훨씬 즐거운 모험이 될 테다.
 
<작품정보>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Juhee from 5 to 7
2022|한국|다정다감 시네에세이
2023.11.08. 개봉|76분|12세 관람가
각본/감독 장건재
출연 김주령, 문호진 외
안민영, 노은정, 이지유, 김유라, 박승현, 문다은, 차영우,
정승현, 강병욱, 진초록 김이담, 엄선영, 김강은, 옥수분,
김우택, 김형근, 강민주, 김예별, 김우석, 윤서진
그리고 강진아, 신정웅, 이민지, 김금순, 박혜진
제작/배급 ㈜모쿠슈라
공동배급 ㈜인디스토리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2022 48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2023 11회 무주산골영화제, '판'섹션
2023 10회 춘천영화제, 인디시네마
2023 3회 바르셀로나한국영화제, 인디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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