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㊳] 젊은 날 느낀 ‘낭만’은 어디에
사돈 부부와 함께 춘천으로 나들이를 갔다.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여유롭게 낭만을 느껴보기 위해 기차 여행을 떠났다. 얽매여 지낸 오랜 직장생활에 길들어 있어서인지 생각처럼 느긋한 나들이가 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기대했던 멋진 낭만을 맛보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사돈이 상세한 하루 여행 일정표를 보내왔다. 군 작전 계획표를 작성하듯 아침에 출발해 오후 돌아올 때까지의 분 단위의 시간 계획표다. 우리 집 근방 내방역에서 9시 10분경에 7호선을 타고 9시 50분 상봉역에서 춘천행 4번 칸 탑승장에서 만나자는 문자다. 춘천으로 나들이 가면서 운치와 낭만을 맛보기 위해 승용차보다는 기차를 타고 가기로 한 것이다. 사돈은 춘천에서 공병 연대장을 한 관계로 그쪽 지리도 잘 알 뿐 아니라 계산에 밝은 관계로 모든 것이 정확하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분기에 한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지난번에는 강릉에 나들이 간 적도 있고, 와인 열차를 타고 영동지역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특별한 이슈가 없을 때는 시내에서 만난다. 비록 사돈이지만 나이가 비슷하여 허물이 없다.
평일 아침이라 전철은 서울 외곽을 벗어나자 좌석이 듬성듬성하다. 대성리와 청평을 지나자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야유회 왔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기차를 타면 바닥에 주저앉아 맥주 마시며 기타 치고 노래를 부르면 주변에서도 호응하는 등 요란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오랜만에 와 보는 것이라 시설이나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강촌과 김유정역을 지나 춘천역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옛 시절의 낭만스러웠던 아련한 추억이 그리워 그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왔지만, 낭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멋진 경치를 봐도 그냥 덤덤하기만 하다. 나이가 들면 감정이 제일 먼저 무디어진다더니 그렇게 된 것인가. 무수한 세월이 흘러갔듯이 낭만도 덩달아 훌훌 떠나가 버린 것 같아 허전하고 안타까웠다.
버스를 타기 위해 춘천역 앞 정류소에 서 있는데 택시가 스르르 다가오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소양댐 아래 닭갈비 집으로 간다고 했더니 그쪽에서 호출이 와서 가는 중이라며 만 원만 달란다. 네 사람의 버스요금과 비슷하여 올랐다. 사실은 기차와 버스 타며 느긋하게 여행하려고 했는데 막상 와 보니 시간이 지체되면서 조급함에 휩쓸리게 된다. 닭갈비로 유명한 통나무집으로 가자고 하자 “그 집에서 식사하고 나온 분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현지 주민들은 00이라는 닭갈빗집에 간다.”라며 강력추천한다. 어느 식당에서 점심 식사한다는 상세한 일정표까지 작성해 온 사돈도 오랜만에 왔더니 요즈음은 바뀐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선 지 택시기사가 추천하는 식당으로 홀린 듯 방향을 틀었다. 식당 앞에 내리자 택시기사는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으며, 손님의 호출을 받고 온 것 같지도 않게 느긋하다. 기사에게 놀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하여튼 맥주를 한잔 곁들이며 닭갈비를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청평사로 들어가는 배가 매시 정각 출발이라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다시 택시를 불러 올라갔다. 소양댐은 그동안 비가 많이 와서 오랜만에 만수위가 되었다. 소양강 다목적댐이라는 글자 밑까지 찰랑거린다. 호수는 물결 하나 일렁임 없이 고요하고 녹음이 우거진 나무 그늘로 수정처럼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나무와 산의 반영이 수면과 대칭을 이루어 선경처럼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다. 20여 분이 걸려 청평사 들어가는 입구에 뱃머리를 댄다. 예전에 왔을 때는 찻길이 없었는데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포장까지 되어있고 식당과 카페가 어서 오라는 유혹을 내려올 때를 기약하며 뿌리치고 올랐다. 그늘진 산길을 쉬엄쉬엄 거닐며 바깥사돈의 군인 시절 일화와 구수한 농담을 맛깔스럽게 받아주는 아내의 맞장구로 인한 호탕한 웃음에 새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가고 유유히 노닐던 버들치는 물속 깊숙이 잠수한다. 나가는 배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청평사는 먼발치서 훑어보고 발길을 돌렸다. 선착장 부근에서 시원한 냉커피 한잔이 바쁜 걸음으로 달아오른 속을 개운하게 식혀준다.
낭만을 느끼고 추억을 되새겨 보자면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떠났지만, 아직 이 나이에도 느긋함을 맛보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가 보다. 30년 이상 경직된 직장생활과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조급하게 살아온 습관이 아직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몸속에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습관화된 시간만큼 긴 세월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낭만은 시간이 있고 여유가 많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젊음과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 것 같다. 경험과 지혜로 얻어질 수도 있고 작은 순간들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단순히 로맨스나 이상적인 상황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옛 추억과 향수에 잠기는 것일 수도 있다. 낭만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올 수 있는 작은 즐거움에도 숨어 있어 마음먹기에 따라 생기고 없어지기도 하는가 보다. 낭만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깊고 풍요로워질 수도 있고, 나이와 관계없이 낭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마음의 눈을 여는 것일 것이다. 삶의 여정을 돌이켜 보고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면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보낸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도 낭만을 즐기는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낭만, 젊은이들만 느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을 맛보기 위해 떠났지만, 옛 추억만 아련할 뿐 어슴푸레 만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도 생활에 쫓기다 보니 내 안으로 들어올 공간이 없어진 것인가. 마음의 순수함이 희석되고 욕심이 가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낭만이 솟아날 수 있도록 좀 더 여유를 가져 보아야겠다. 호젓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연인과 함께할 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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