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온 조선제일검의 편지
중국 썬더토크 게이밍(TT)에서 두 번째 해를 보낸 ‘유칼’ 손우현이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TT는 올해 중국 ‘LoL 프로 리그(LPL)’에서 스프링 시즌 정규 리그를 8위로 마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서머 시즌에는 13위를 기록하는 데 그쳐 아쉽게 마무리했다. 성취감과 실망감이 공존했던 한 해,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친 뒤 중국에서 비시즌을 보내고 있는 그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중국에서 이제 2년을 보냈어요. LPL은 경기를 치르면 치를수록 재미가 느껴지는 리그입니다. 팀들의 실력이 함께 상승해서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 같아요.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올해를 총평한다면 ‘재밌는 한 해였다’고 하고 싶어요.”
“기억에 남는 순간이요? 정말 많죠. 스프링 시즌 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도 했고요. ‘루키’ 송의진 선수를 이겼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반면 서머 시즌 초반에 헤맨 점은 아쉬워요. 팀 분위기가 빠르게 잡혔다면 스프링 시즌보다 좋은 성적을 기대할 만했거든요. 스크림 성적이 좋았으니까. 안타깝게도 시즌 말미가 돼서야 분위기가 잡혔어요.”
TT는 지난해 LPL 스프링 시즌을 3승13패(17위), 서머 시즌을 7승9패(12위)로 마쳤던 팀이다. 스타 선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냉정하게 상위권 전력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연말 리그 전초전 격인 ‘데마시아 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덕분에 팀과 선수들은 2023년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2023시즌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데마시아 컵 결승전에서 비리비리 게이밍(BLG)이랑 풀 세트를 치렀죠. 경기력이 만족스러웠으니까 LPL에서도 플레이오프는 갈 거란 기대감이 있었어요. 시즌 초반에는 기대했던 만큼의 경기력이 나오지 않았지만 시즌을 치르면서 미드·정글의 호흡이 잘 맞아들어가기 시작했어요. 다른 라인과의 호흡으로도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전체적인 팀의 기량이 올랐어요.”
손우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은 건 송의진이 속한 TOP e스포츠(TES)와의 스프링 시즌 맞대결 승리 날이다. 손우현은 2018년 가을 송의진의 인빅터스 게이밍(IG)에 져서 ‘LoL 월드 챔피언십’에서 탈락한 바 있다. 그는 이날 송의진을 잡으면서 당시 IG 멤버들 상대로 전부 복수에 성공했다. 설움을 모조리 씻어내는 데 걸린 세월만 5년.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 동안 눈물을 흘렸다.
“‘루키’ 선수와 대결한 날 사실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았거든요. 그 경기는 우리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 여부와도 연관이 있는 중요한 경기였죠. 팀원들이 잘해주기도 했고 저 또한 있는 힘껏 플레이해서 그를 이길 수 있어요. 사실 경기 시작 전에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막상 이기니까 순간 지난 몇 년간의 기억과 기쁨이 밀려오더군요.”
스프링 시즌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지만 기세를 여름까지 이어나가진 못했다. 시즌 초반에 첫 승을 거둔 뒤 뒷심 부족으로 6연패를 당한 게 뼈아팠다. TT는 5승11패, 13위로 서머 시즌을 마쳤다.
“서머 시즌 초반 대진이 좋았거든요. 우리가 스프링 시즌에 지지 않았던 팀들과의 경기가 연속으로 잡혔어요. 스크림 성적도 좋았으니까, 초반에 잘하면 플레이오프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각자의 컨디션 부진, 약간의 불운 등이 겹치면서 초반 승수를 챙기지 못했죠. 시즌 초반에 강팀들한테 지면 후반을 바라볼 수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약팀들한테 져버리니까 기세를 타기가 어렵더군요.”
2년 동안 ‘싸움의 리그’ LPL에서 부대끼면서 손우현은 변했다. 헤드셋을 벗었을 땐 광저우와 상하이에서의 삶에 익숙해졌고, 헤드셋을 썼을 땐 호전적인 적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물러서지 않는 법을 배웠다. 보통 LCK 출신 선수들이 LPL에 진출하면 적응에 애를 먹는 장거리 이동과 홈&어웨이 방식도 손우현은 동기부여로 받아들였다.
“저는 오히려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며 경기를 치르는 걸 좋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이렇게 힘들게 어웨이 경기장까지 왔는데 지고 돌아갈 수야 있겠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평소보다 더 이기고 싶더라고요. 비행기를 타고 와서 경기에서 진 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 힘들거든요. 그래서 더 이기고 싶어져요.”
“연습 방향이나 연습량은 두 리그가 다르지 않아요. 다만 경기 스타일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어요. LPL은 한 시즌 동안 한 팀과 한 번만 붙어요. 그러다 보니 소위 ‘날로 먹는’ 빌드가 종종 나와요. 올해는 요네나 렐이 그런 픽들이었어요. 팀이 워낙 많아서 각 팀을 세세히 분석하기엔 시간이 모자라거든요.”
“LPL은 LCK에 비해 공격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기본기는 LCK, 변수 창출은 LPL인 셈이죠. LPL은 운영을 선호하는 팀들조차도 싸움을 피하려 들지 않아요. 저도 재미없게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화끈하게 이기고 지는 게 좋더라고요.”
어느덧 TT에서의 생활도 익숙해졌다. 특히 정글러 ‘베이촨’ 양 링과는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그는 ‘베이촨’을 두고 “경기 내외적으로 언제나 나를 도와주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베이촨’에겐 한국 정글러스러운 느낌이 있어요. 기존 중국 정글러들과 달리 운영에 비중을 두는 편이죠. 그래서 TT는 게임이 잘 풀리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육각형 팀’이 돼요. 운영도 싸움도 잘하죠. 반대로 게임이 잘 안 풀리면 장점이 없는 팀이 돼버리지만요.”
“‘베이촨’은 경기 내외적으로 언제나 저를 도와주는 선수예요. 제가 잘 풀릴 때도, 안 풀릴 때도요. 게임 안에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죠. TT는 지더라도 답답하게 지진 않아요. 죽어도 다 같이 죽죠. 정글러인 ‘베이촨’의 결단력 덕분이에요.”
그가 LPL 미드라이너로서 자리를 잡는 데도 ‘베이촨’의 도움이 컸다고 귀띔했다.
“중국에 온 뒤 약 1달간은 적응에 애를 먹었어요. 리그 내 다른 미드라이너들의 플레이를 보고, 혼자 플레이스타일에 대한 고찰도 하면서 스스로를 바꿔나갔죠. 이전에는 라인전에서 내가 이득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그런 플레이가 팀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베이촨’과의 소통이 큰 보탬이 됐어요.”
한창 TT가 부진하던 시기에 손우현은 ‘베이촨’에게 함께 산책을 제안했다. 정체 또는 도태 위기에 놓인 용병 선수는 숙소 밖에서 같은 팀 정글러에게 ‘유칼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베이촨’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손우현은 그의 피드백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였다.
“정말 다사다난한 한 해였어요. 특히 서머 시즌엔 종료 한 달 전까지도 스스로 기량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질 않더라고요. ‘베이촨’을 불러서 솔직하게 ‘네가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줘. 유칼은 어떤 미드라이너 같아?’하고 물어봤어요. 그때 ‘베이촨’의 솔직한 감상을 듣고 플레이에 변화를 준 이후로 다시 경기가 잘 풀리기 시작했죠.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 외에 팀원들이 바라는 나 또한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베이촨’이 뭘 말해줬냐고요? 당시에는 미드라이너가 애니 같은 챔피언을 골라서 로밍으로 게임을 푸는 메타였어요. 저는 당시에 트리스타나나 요네로 캐리 역할을 맡았었고요. 제가 먼저 ‘베이촨’에게 ‘어차피 이대로 시즌이 끝나면 너랑 나도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몰라.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한 웨이브를 버리더라도 정글 교전을 도와주면 좋겠어’라고 하더라고요. ‘상위권 미드들은 이렇게 한다’고 예시를 들며 조언도 해줬고요.”
“여기서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어요. 여전히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이미 게임에서 팀원들과 소통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요. 일상에서도 팀원들과 중국어로 얘기해요. 저한테 언어적인 재능이 있냐고요? 그건 모르겠어요. 언어 공부는 재능보다 듣고 싶은, 말하고 싶은 의지가 중요하더라고요(웃음).”
LPL은 LCK 못잖게 쟁쟁한 미드라이너들이 활약하는 무대다. 조선제일검도 자국의 무장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칼을 휘두르는 중국 전사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적잖게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중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칼손잡이를 쥘 수 있게 됐다.
“LCK나 LPL이나 미드라이너들의 기량이 출중하긴 마찬가지예요.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건 리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LCK 선수들도 LPL에 오면 스타일이 바뀔 거예요. LPL 선수들이 LCK에 진출해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개인적으로는 ‘샤오후’ 리 위안하오 선수와의 맞대결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샤오후’ 선수는 수비적이란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로 붙어보니 공격적으로 게임을 풀어나가더라고요. 가장 잘한다 싶은 선수는 ‘나이트’ 줘 딩 선수였어요. 팀을 위하는 플레이의 비중이 높아서 보고 배울 점이 많더라고요. ‘나이트’ 선수는 라인전이 강하다는 인식과 달리 스탯을 보면 CS 리드율이 높지 않아요. 늘 탑이든 봇이든 정글이든 팀원들 도와주러 움직여서 그런 거예요.”
기세 좋게 시작했던 봄, 웃으며 마무리하지 못했던 여름, 다른 선수들을 보며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가을. 손우현의 2023년은 그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했다. 그는 내년에는 반드시 LoL 월드 챔피언십에 나서겠다는 각오로 마지막 계절을 난다.
“어느덧 중국에 온 지 2년이 됐네요. 아직까지 저를 기억하고 응원해주시는 팬분이 1명만 있어도 감사한 일이죠. 팬분들 덕분에 항상 힘을 얻습니다. 올해 롤드컵을 보니까 내년에는 꼭 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수들이 월즈 무대에서 경기하고 있는 걸 보면 같은 프로게이머로서 부럽더라고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준비해서 저도 내년에는 반드시 나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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