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파에 죽임당한 의병대장 정인홍

김삼웅 2023. 11. 7. 07: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겨레의 인물 100선 14] 의병대장 정인홍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사람들이 바른 선비 사랑하기는
호랑이 털가죽 좋아함과 서로 비슷해
살아 있으면 죽이려 들고
죽은 뒤에라야 아름답다 칭찬하네.

남명 조식의 <우금(偶昑)>.이란 시다. 여기 소개하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은 죽은 뒤에도 오랫 동안 칭찬이 따르지 않은 분이다. 남명의 수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조직하여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하고, 선조와 광해군 조정에서 정치개혁과 민생안전을 추구하는 개혁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정1품인 우의정을 다섯 차례, 좌의정을 한 차례, 영의정을 세 차례나 사양하면서 선비는 진퇴와 머무름의 때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실천한 보기 드문 학인이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절친이었을 단재 신채호가 중국 루쉰 감옥에서 죽임을 앞두고 정인홍 전기를 쓰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민족사학자의 예리한 시각에도 정인홍의 인물됨과 공적 그리고 인조반정 후 권력을 탈취한 수구파에 의해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한 이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폄훼당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조시대나 명색이 민주공화제 나라에서 포악한 지배층은 반대자를 걸핏하면 역모나 반국가 사범으로 몰아 죽이거나 투옥한다. 당장에 죄상이 없으면 옛 일을 뒤적이거나 날조한다. "왜란이 일어났을 적에 정인홍은 낙동강 주변에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했다. 이런 과정에서 관가의 곡식을 실어오고 토호의 재물과 노비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그리하여 수령·토호들은 정인홍의 위세에 눌려 곡식과 노비를 내주기도 했으나 앙앙불락하는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이이화, <정인홍과 이귀>, <인물한국사 5>) 그에 대한 반대세력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정인홍의 약전을 인용한다.

정인홍의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이다. 조부는 언우(彦佑)이고, 부친은 건(建)이다. 모친은 진양 강씨, 눌(訥)의 따님이다.

내암은 1536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사촌에서 태어났으며, 1623년 인조반정 직후 폐모살제론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척신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조식에게 급문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20세 전후로 합천 삼가(三嘉) 토동(兎洞)의 뇌룡사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조식은 내암을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허여하였는데, "덕원이 있으면 나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 사관이 "정인홍은 조식을 좇아 노닌 지 가장 오래되었으며, 의발의 전함을 얻은 자이다"라고 평가한 것에서, 남명 문하의 고제로서 스승의 학문 요체를 가장 잘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1558년 내암은 젊은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응시한 적은 없었다. 1573년(38세) 학생으로 6품직에 제수되면서 환로(宦路)에 들어섰다. 1580년 사헌부 장령으로 재임하면서 잘못을 저지른 이를 탄핵할 때 힘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을 가리지 않았으며, 금령 (禁令)을 매우 엄하게 실시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 때 동문인 최영경이 모함을 받아 죽자, 정인홍은 기축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철과 성혼(成渾)을 원수처럼 여기며 끝내 용서하지 않았는데, 이 일로 서인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성주에서 의병을 격퇴하여, 영남 의병장의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1605년 효충장의선무 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이해에 조식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문집 서문에서 이황을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사림의 대대적인 지탄을 받았다.

1608년 정인홍은 소를 올려 여의정 유영경의 참수를 청하였다가 영변으로 귀양 갔으나, 유배중 선조가 급사하여 풀려났다. 당시 선조가 병이 깊어 세자인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유영경에게 밝혔는데, 유영경은 이를 은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개봉(改封)하려 하였다. 이에 정인홍은 동궁을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 죄로 유영경을 참수해야 한다고 소를 올린 것이다. 이 일로 정인홍은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고, 산림에 있으면서도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인홍은 귀양에서 풀려나 도성에 이르기 전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0년 좌찬성에 제수되자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비난하는 글을 올려 사람의 분노를 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되는 계기가 되었다. 1612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1613년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해 영창대군의 처벌을 반대하는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으며, 1615년 인목대비의 폐비론을 반대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고, 폐모살제의 누명을 입고 참형을 당하였다. 이후 정인홍을 주축으로 한 대북파는 정계에서 몰락하였고, 정인홍은 음험하고 포악한 인물로 과장되고 격하되었으며, 조선시대 내내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다.
1908년 신원되자 후손들에 의해 1911년 15권 7책의 <내암집>이 간행되었다. <최석기 외, <남명 조식의 문인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