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VESTORS]⑦정일부 대표 "반도체·배터리 다음은 바이오"
초기 기업 투자 기준은 산업의 트렌드, 기술력, 리더십
에코프로, 셀트리온, 우아한 형제들, 크래프톤, 무신사 등 발굴
편집자주 - 한국 자본시장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어느 때보다 혼탁하다. 작전이나 반칙이 판을 친다. 그러나 외환위기부터 닷컴버블,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도 자신만의 투자 세계를 개척해 개인 투자자들의 모범으로 떠오른 투자가도 많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자본시장의 전쟁 같은 스토리와 그들의 철학, 실패와 성공담으로 돈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한다. 가치투자와 행동주의, 글로벌 '큰 손'으로 거듭난 국내 연기금 최고투자책임자부터 사모펀드와 자산운용사를 이끄는 리더, 금융사 최고경영자 등 다양한 분야 고수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저는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반도체, 이차전지, 그 다음으로 우리 경제를 견인할 산업은 바이오·헬스케어 산업입니다."
정일부 대표는 국내 최대 벤처캐피털(VC)인 IMM인베스트먼트의 최고투자책임자(CIO)다. 에코프로, 셀트리온, 우아한 형제들(배달의 민족), 크래프톤, 무신사, 버킷플레이스(오늘의 집) 등을 초기부터 발굴했다.
"저희가 지금 한국 산업을 이끌어 나갈 가장 큰 세 개의 축으로 보는 것이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입니다. 반도체, 이차전지는 이미 산업을 견인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기업이 나올 겁니다. 반도체는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 기업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퓨리오사 AI, 리벨리온, 망고 부스트 등 주목하고 투자한 기업들이 있죠. 이차전지는 말할 것도 없고요. 넥스트바이오메디컬과 같은 바이오 회사들도 기술력이 아주 뛰어나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의대 쏠림? 바이오 벤처로도 인재 쏟아져
정 대표는 국내 이차전지 소재 대표기업 에코프로를 가장 먼저 알아본 투자자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스타트업 시절부터 눈여겨보고 투자했다. 이후 지주사인 에코프로를 비롯해 에코프로비엠, 에코프로머티리얼즈, 에코프로이노베이션 등 에코프로 그룹에 전방위적으로 투자했다. 셀트리온 역시 마찬가지다. 셀트리온이 지금의 반열에 오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셀트리온 투자 성과는 국내 자본시장에 IMM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이력을 가진 정 대표가 현재 주목하는 게 바이오·헬스케어 분야다. 국내 우수 인재 풀이나 고령화 속도, 기술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분석적 전망이다.
"요즘 똑똑한 학생들이 의대를 선호하죠. 제일 똑똑한 학생들이 의대로 쏠린다고 걱정을 하시는데, 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오 벤처기업으로도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도 그런 기업에 투자를 많이 했고요. 바이오·헬스케어 산업이 성장하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딱 맞는 산업이죠. 일단 인재 풀이 좋고, 연구개발비가 많이 들지만, 고부가가치 산업이라 도전할 가치가 있습니다. 꼭 끝까지 가서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이전을 하면서 로열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본집약적이지 않다는 점이 투자 측면에서는 강점이죠. 위탁개발생산(CDMO)도 우리가 잘합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나 셀트리온처럼요. 어려운 기술인데 이런 비즈니스가 우리나라 환경에 적합합니다. 국내 인구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점도 다른 나라보다 우리가 바이오·헬스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키기에 적절한 구조죠."
정 대표는 K-콘텐츠의 미래도 희망적으로 내다봤다. 지금은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기업들이 콘텐츠 유통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만, K-콘텐츠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킨 게 저는 BTS라고 봅니다. 그만큼 K-콘텐츠의 힘을 크게 보는데요. 양질의 콘텐츠를 지금은 OTT 회사들이 입도선매를 해서 우수한 배우, 작가, 감독들과 계약하고 방영권을 가져가고 있지만요. 앞으로는 방영권에 대한 주도권을 우리가 가져올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가 돈을 대서 찍지만 어느 정도 기간 넷플릭스가 독점 방영하고 그 후에는 판권은 우리가 가져오는 방식, 즉 쉽게 말해 해외 자본을 유치해서 만들고 그 후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바뀔 것으로 예상합니다. K-콘텐츠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올 겁니다."
산업의 트렌드와 기술력, 그리고 리더십에 주목
IMM인베스트먼트는 1999년 출범 후 수많은 기업에 투자했다. 투자한 유니콘기업 가치를 합치면 20조원이 넘는다. 정 대표의 3년 이하의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 결정 기준은 무엇일까.
"점쟁이가 아닌 이상 딱 꼬집어 선택하기 어렵죠. 저는 가장 먼저 산업의 트렌드를 봅니다. 이 트렌드가 맞느냐. 이것을 잘 할 수 있는 능력과 실력을 갖춘 사람이 이끄는 기업인가.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이런 것은 대화하면서 느끼는 것이고요. 그 사람의 경력, 배경을 봅니다. 질문도 많이 하죠. 주위에 어떤 사람이 모여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리더십이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그 주변에 우수한 사람이 모입니다. '저 형이랑은 끝까지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모입니다. 투자 기업 선택은 하나의 키워드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은 인공지능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죠. 다양한 것을 보고 판단합니다."
바이오, 콘텐츠 기업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지만 이제 플랫폼 기업에 대한 신규 발굴 투자는 하지 않는다. 국내서 플랫폼 기업들은 이제 다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한다.
"플랫폼에서 배는 떠났습니다. 기존 플랫폼들이 더 거대해지는 상황입니다. 포털기업들을 보세요. 네이버와 다음이 양강으로 자리 잡은 후에 아무도 도전하지 않죠. 이제 플랫폼 기업들도 분야별로 다 1~2등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투자를 받고, 마케팅비를 쓰면서 회원 수를 늘리고 서비스를 고도화하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특별한 서비스, 특별한 노하우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발전하는 벤처 생태계…글로벌 경쟁력 갖춘 K-협력사
국내 벤처 생태계에 대해서 그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대기업의 협력사로 성장하면서 '갑을관계'로 종속돼 있던 과거의 벤처 생태계가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독자생존' 테크 기업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기술력을 가진 테크 기업들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를 큰 축으로 하는 벤처 테크기업들이죠. 벤처기업들이 예전에는 삼성전자, 현대차의 공급망 역할을 하는 협력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의 제조업이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기술을 확보한 기업들이죠. 대기업의 지배 하에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형태의 기업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제품이 쓰여야 하니까 삼성전자, 하이닉스에서 제품 테스트를 하고 납품을 하고 이런 과정이 필요하죠.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기술력을 확보하면 글로벌 고객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소재·부품·장비 기업들, 팹리스 기업들이 그런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고무적입니다. 망고 부스트라는 회사를 예로 들면 효율적인 데이터센터 서버 운영을 할 수 있는 칩을 개발해서 삼성전자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바이오 부문에서는 넥스트바이오메디컬이라는 회사의 내장 기관 지혈 기술이 세계적으로 뛰어납니다. 몸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면 지혈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스프레이 형태로 젤을 분사하는 방식으로 지혈하는데 오류가 많습니다. 이 회사의 기술은 조준이나 도포가 잘 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녹아내려서 흡수되는 방식입니다. 매우 혁신적이고 모방이 어려운 기술입니다. 이런 기업들이 줄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벤처 생태계가 대기업 종속을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정부 지원을 통한 초기 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꼽았다. 코로나19 이후 강력한 긴축 정책이 펼쳐지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의 '유동성 파티'가 K-벤처기업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초기 기업 육성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시절까지 이어져 그 결실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출자가 이미 70% 돼 있고, 민간에서는 30%만 자금을 구해오면 펀드가 완성되는 초기 기업 투자펀드 이런 것이 생기니까 3년 미만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죠. 20년 전에는 초기 기업이 10억 투자를 받으면 정말 많이 받았다 했지만, 지금은 초기 기업도 좋은 회사는 30억, 50억, 많게는 100억원도 받습니다. 그 자금으로 더 좋은 인력을 뽑고, 장비를 사고, 연구·개발을 할 수 있는 것이죠. 해외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투자 단위가 다르기 때문에 잘 될 수밖에 없죠. 예전에 벤처들이 대기업 눈치만 보고 납품가격 인하 요구를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분기마다 원가절감 한다고 생산단가를 낮추기만 하던 그런 것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전반적으로 굉장히 벤처 생태계가 양호해진 것이죠. 현재 1년에 1조원 이상의 벤처투자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죠."
투자하고 싶은 기업, 투자받고 싶은 VC로 도약해야
물론 강력한 긴축정책의 여파로 VC와 스타트업·벤처기업들의 상황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개점 휴업' 상태인 VC들도 상당수다. 고금리 장기화와 전쟁 등 부정적 외생변수 탓이다.
"지금 시장환경은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개점 휴업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IMM이 작은 회사일 때는 한가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가방에 회사 소개서를 링으로 말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홍보를 했습니다. 펀드를 만들려고 뷰티 콘테스트(위탁 운용사를 선정하기 위한 공개 입찰)에 나가면 줄줄이 떨어졌고, 어떻게 겨우겨우 하나 되고 그랬죠. 처음에는 힘들어요. 그럴 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투자하고 싶은 우수 기업이 있다고 하면 그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우수 기업이 어떤 VC에서 투자받고 싶을까요. 이왕이면 나를 잘 서포트하고 관리해 줄 수 있는 VC에서 받고 싶을 겁니다. 첫 투자를 하고 나서 팔로온(Follow-on) 투자를 하면서 든든하게 버텨줄 수 있는 VC에서 받고 싶을 겁니다. 갑질하지 않고 파트너를 도울 전략이 있는 VC에서 받고 싶겠죠. 그렇다면 그런 VC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히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타트업·벤처 투자에서 가장 보람된 일은 투자한 기업들이 유니콘으로 잘 성장해 주는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벤처의 성장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투자한 기업이 상장하고 엑시트(투자금 회수) 하면서 '잘 성장해줘서 고맙습니다'하고 손을 흔드는 일은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게 제일 보람이 있죠. 벤처기업의 성장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도 연결됩니다. 미래 산업의 주역이죠. 그런 과정에 기여를 한다는 것이 보람이고 직업적인 자부심도 느낍니다. 투자한 기업에서 모럴해저드가 발생할 때는 회의감도 느껴지고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좀 더 똑똑해지고 아이디어로 무장하는 것을 보면 힘이 납니다. 저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믿습니다. 의대만 많이 간다고 나쁘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고부가가치 산업인 바이오·헬스케어 분야가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 우리 산업을 견인할 겁니다. 지켜보고 응원해 주십시오."
◇정일부 IMM인베스트먼트 대표는=199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반도체 총괄 기획팀에서 근무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스타트업이 성장해가는 과정에 기여하는 벤처캐피털을 접하고 조인했다. 이후 아시아인베스트먼트를 거쳐 IMM인베스트먼트에 둥지를 텄다. 현재 IMM인베스트먼트에서 VC 투자를 총괄하는 최고투자책임자(CIO)를 맡고 있다. 벤처캐피털에서 약 23년 이상 일하고 있는 지금도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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