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뜨락에서] 마음에 길을 내는 하루

2023. 11. 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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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날에 책이 출간됐다. 반짝이는 가을빛에 붉게 물든 나뭇잎마저 빛처럼 내리던 날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흥분한 딸의 목소리가 교회를 채웠다. 하던 일을 멈추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눈치챈 신호등이 빨간 불빛으로 심통을 부렸지만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바람에 뒹구는 모습을 보며 ‘허허허’ 웃었다. 책 한 권의 설렘이 어찌나 크던지 낙엽 향기에 취해 가을 이불을 덮어야 하는 땅을 울릴 것만 같았다.

첫 책의 냄새를 정확하게 표현할 방법은 없다. 어슴푸레한 기억에 풀칠한 창호지가 말라가는 냄새에 손때 묻지 않은 잉크 냄새가 섞여 났다고 표현할 뿐. 택배 상자 안에서 다소곳하게 나를 기다렸던 첫 책. 익숙한 느낌에 낯선 감정 하나였다. 내 책이란다. 조심스럽게 한 권을 꺼내었다. 딸이 그려 준 표지의 길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벅찬 감동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나님 잘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책을 출간한 지 일 년이 됐다. 11월 11일이면 첫 사인을 한 날이다. ‘장진희’ 내 인생을 기록한 책 속에 까만 펜으로 이름을 쓸 때 나를 다시 찾은 기분을 느꼈었다. 갓 결혼한 어린 내 손을 지금의 내가 붙잡고 걸었다. 나란히 걷는 길에는 지나온 날들이 언어로 피어나 뒤를 따라왔다. 보잘것없어서 말하지 않았고 버려졌던 이야기들. 내가 살아오는 동안 함께 걷고 있었는지 삶의 이야기라며 주위를 맴돌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어린 나를 끌어안을 때 삶의 이야기들도 함께 보듬어졌다.

작은 교회 사모로 20년을 살았다. 가난이 하루를 삼키고 그 안에서 하나님으로 일어서는 반복된 생활을 했다. 주변에 아는 이도 많지 않았고 삶 또한 다채롭지 않은 단순함이었다. 가정과 교회만 맴돌고 있었다. 그랬는데. 샘솟는기쁨 강영란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책을 출간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닌,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쓴다고 하는데. 글을 써보지 않았던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더욱이 책 한 권을 채울 만한 인생도 아니었다. 교회도 미자립이고 특별한 이야기도 없었다. 그날, 페이스북에서 출판사 이름을 봤던 날. 하나님이 움직이셨던 날. 늘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남편의 속삭임에 물들었는지 이상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만약 책을 쓴다면 이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섬세한 보내심은 결코 막을 수가 없었다.

원고도 없는 상태에서 출판사와 계약했다. ‘나의 삶이 글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많은 날을 고민했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 평생 시를 써본 적이 없고 문학 수업 한번 받지 못한 할머니가 아흔여덟 살의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해 베스트셀러 시집을 냈다. 할머니의 시는 솔직하고 담백했다. 특별한 것이 아닌 무심코 지나쳐 버릴 일상의 일들을 소중하게 써 내렸다. 할머니는 하루의 일들이 모여 매일의 힘이 된다고 시를 통해 말했다. “아! 나는 하루하루 하나님과 동행했던 길이 있구나.” 가난과 고통에 물러서지 않고 마음을 다해 걸었던 여정. 시간을 만들고 채우셨던 하나님 사랑, 아등바등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따라 바라봤던 믿음의 시선. 그게 내 삶의 전부이고 이야기였다.

‘마음에 길을 내는 하루’는 이야기를 갖고 세상에 나왔다. 작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십이 넘은 작은 교회 사모는 새로운 길을 내었다. 하나님 따라 걷고 때론 투정 부리며 뒤따랐던 이야기들은 노래가 됐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내 이름과 함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언젠가 책에서 마사 킨더의 글을 읽은 적 있다. “자기의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누구나 약자다. 남들이 당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남들이 말하게 하지 마라.”

장진희 사모(그이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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