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주의 시선] 혁신과 민심의 오픈런
글로벌 경기 침체에 대한 경고음이 연일 귓전을 맴돌지만, 블랙프라이데이(오는 24일)는 어김없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 미국 추수감사절 직후 금요일로, 연말 쇼핑 시즌의 개막을 알리는 이 날을 겨냥해 발 빠른 업체들은 이미 선제적 할인 행사로 소비자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파격 세일의 감동을 맛보려고 1년을 꾹 참고 기다려온 사람들은 과녁 속 사냥감을 거머쥐는 궁극의 순간을 꿈꾸며 오픈런(매장문이 열리자마자 달려 들어가는 것)을 잔뜩 벼른다.
오픈런은 할인 행사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값이 꽤 비싸더라도 혁신과 매력을 겸비한 신세계 앞에선 소비자들은 기꺼이 전의를 불사른다. 100만원이 훌쩍 넘는 스마트 기기가 출시된 지난달 중순 서울 주요 매장 앞엔 모험과 호기심, 탐구욕으로 충만한 선구자들로 긴 줄이 늘어섰다. 가상현실 게임 속 미지의 공간을 탐험하기 위해서, 또는 멋지게 차려입은 연예인 옷맵시에 반해 인터넷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온라인 오픈런 현상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한 사회나 조직 안에서 개혁·혁신이 어떻게 보급되고 전파돼 가는지를 설명한 에버렛 로저스의 혁신확산이론(『개혁의 확산』)은 그 구성원을 혁신 성향에 따라 개혁자(2.5%)-초기 채택자(13.5%)-초기 대다수(34%)-후기 대다수(34%)-비개혁자(16%)로 범주화한다. 개혁자가 불모의 땅에 혁신의 깃발을 꽂으면 초기 채택자가 혁신 오픈런으로 승인 도장을 꾹 찍고 바람몰이에 나선다. 개혁 성패의 열쇠를 쥔 초기 채택자가 우리에게 꽤 익숙해진 얼리어답터(early-adopter)다. 얼리어답터가 지핀 혁신의 불씨는 주판알을 튕겨가며 시장을 관망하던 초기 대다수로 차츰 옮겨붙는다. 혁신 패러다임의 변화는 비로소 5부 능선을 넘어 대세를 형성하게 된다.
혁신의 길에는 그러나 필연적으로 거부 반응이 뒤따른다. 혁신의 세기가 강할수록 변화에 대한 반발력은 그만큼 커진다. 가장 큰 고비는 얼리어답터에서 초기 대다수로 혁신이 확장하는 과정에 존재하는 침체기인 캐즘(Chasm, 『제프리 무어의 캐즘 마케팅』)이다. 그 단절의 강을 건너지 못하면 혁신은 힘을 잃고 도태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혁신의 저주를 피하려면 틀에 박힌 사고·관행에 대한 집착·복지부동 등 반혁신의 징후(포브스, 2012)를 얼마나 빨리 포착해 도려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초기 개혁세력의 과단성과 신중함, 전략적 치밀함 등 혁신 추진의 디테일도 그만큼 절실해진다.
위기에 빠진 집권 여당에서 혁신의 싹을 틔워야 할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임명 이틀 만에 내놓은 ‘낙동강 농담’ 발언은 그래서 두고두고 유감이다. 인 위원장은 지난달 25일 “낙동강 하류 세력은 뒷전에 서야 한다”고 언론 인터뷰했다가 ‘영남 물갈이’ 논란이 일자 “농담도 못 합니까”라며 바로 한 발 후퇴했다. 인적 쇄신이 농담의 대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고 당혹스러운 모습이었다. 천금같이 무거워야 할 혁신위원장 말의 무게감도 출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번 잘못 꿴 단추는 며칠 만에 또 사달이 났다. 인 위원장은 다른 몇몇 언론 인터뷰에서 영남 중진 스타 의원의 험지 출마를 거론하며 “주호영(의원), 김기현(대표)도 스타”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자, “(특정인 거론은) 오보”라고 대꾸했다. “생각이 달라도 만나는 것이…”라며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만남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인터뷰 기사에도 “만나라고 언급했다는 건 오보”라고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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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요한 위원장의 잇단 말 번복
혁신위 초기 행보부터 흔들려
여권이 바뀌어야 민심 움직여
」
말부터 던져놓고는 나중에 주워 담는 건 기성정치권의 구습이지 혁신 수장의 자세는 아니다. 혁신위는 “이름을 못 박은 적은 없지만, 영남권 능력 있는 의원들이 서울에 출마하는 방식으로 희생하고 도와야 할 필요성은 있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고 수습했다. 그러나 진중치 못한 처신은 혁신 저항세력에 역공의 빌미를 주고, 쇄신의 신호탄을 고대하던 얼리어답터들에게선 오픈런의 김을 빼버리는 패착이 된다.
실점 만회에 나선 혁신위는 통합과 희생을 내걸고 여당 지도부∙중진∙친윤 핵심의 불출마나 험지 출마를 압박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자체론 평가할 만하지만, 걸맞은 호응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국엔 별무소용이다. 진짜 혁신을 이뤄내려면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분출한 유권자의 목소리부터 제대로 진단해야 한다. 그리고 민심 이반을 초래한 환부에 꼭 맞는 처방전을 내야 한다. 여권에 드리워진 오만과 불통, 독선의 그림자를 싹 걷어내는 환골탈태 없이 내년 총선에서 민심의 오픈런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다.
임종주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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