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아내가 떠난 빈자리, 슬픔을 견디는 카메라
16세기 조선에 살았던 ‘원이엄마’라는 이가 있다. 그가 후세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8년 경북 안동의 옛 무덤에서 발굴된 편지 덕분이다. 무덤의 주인이자 젊은 나이에 세상 떠난 남편을 향해 절절한 마음을 한글로 쓴 편지다.
요즘과 달리 남편을 ‘자내(자네)’라고 부르며 시작한 편지는 이 부부가 “남도 우리 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할까” 하는 말을 주고받을 만큼 애틋한 사이였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남편이 이 편지를 보고 꿈에 와서 상세한 얘기를 들려주길 바라는 마음은 종이 한 장에 줄줄이 써 내려간 것으로 모자라, 당초 여백으로 비워두었던 위쪽으로도 이어진다.
원이엄마는 이렇게 편지를 썼지만, 애도의 방식이 누구나 같은 건 아니다. 우리네 전통 장례에서 곡(哭)을 했듯 문화권에 따라서는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처럼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개인적 기억을 철학적 사유 속에 풀어낸 이도 있다. 17세기 무굴제국의 황제처럼 부인의 죽음 이후 거대한 궁전 같은 무덤 타지마할을 만든 이도 있다.
때로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지난주 개봉한 다큐멘터리 ‘약속’은 때 이르게 엄마이자 아내를 떠나보낸 어린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은 언제부터인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시 쓰기는 계속되고, 그렇게 쓴 시를 하늘나라의 엄마를 향해 소리 내 읽어주기도 한다. 시마다 아이다운 말과 시선과 그리움이 전해진다. ‘기분이 좋아지는 첫눈/ 마음이 추워지는 첫눈/ 엄마가 보고 싶은 첫눈.’(시 ‘첫눈’ 중에서)
아들에게 시가 있다면, 아버지에게는 영화가 있다. 아버지 민병훈 감독은 러시아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여러 예술영화를 만들어왔다. 그가 일상에서 카메라를 드는 것은 여느 동년배가 펜을 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일 터. 다큐에는 시를 쓰고, 또래나 이웃과 어울리고, 등굣길에 오르는 소년의 모습만 아니라 엄마의 투병 이후 이 가족이 이주해서 살기 시작한 집 주변의 숲을 비롯해 제주의 풍광이 다양하게 비친다.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다큐를 처음 선보인 직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카메라를 든 시간이 “무언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짐작대로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 생각으로 찍기 시작한 건 아니란 얘기다. 그는 “슬픔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러 계절과 날씨를 아우르며 담아낸 자연은 아내가 떠난 뒤 그가 지내온 시간을 응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극적인 전개 없이도 그렇게 응축된 자연이 그리움 속에 조금씩 커가는 소년의 모습과 함께 위로를 안겨준다.
‘약속’은 이 가족의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면서, 보는 이에게 온전한 애도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한다. 영화는 이런 예술이기도 하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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