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광주 출신이면 안 되지" 아버지의 전라도 혐오

김성호 2023. 11. 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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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79]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 <말이야 바른 말이지>

[김성호 기자]

독립영화에도 희망은 있을까. 상업영화 체계의 투자와 배급망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독자적인 자본과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는 영화를 흔히 독립영화라 부른다. 말이 독자적인 자본이고 방식이지, 투자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수익을 기대하는 상업영화 체계로부터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곧 수익을 거두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연히 투자 유치가 어렵고 규모가 작으며 유능한 인재를 수급하기도 만만찮다. 콘텐츠의 범람으로 상업영화조차 치열하게 경쟁하는 현실에서 눈 높은 관객에게 독립영화가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독립영화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업영화가 내던진 주제 가운데도 오늘의 관객이 보아 마땅한 목소리가 있는 것이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상업영화가 미처 거두지 못한 반짝임을 독립영화 안에서 만나기도 한다. 규모의 경제에 밀린 작지만 소중한 목소리에게 숨 쉴 터전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립영화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하물며 시대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지기까지 한다면야.

역사 깊은 서울독립영화제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해 올해 극장배급까지 한 작품이 있다. 한때는 독립영화계의 기대주로 주목받았던 윤성호 감독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바로 그 영화다. 한국 독립영화계가 공을 들여 제작한 작품답게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와 무주산골영화제 등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연달아 초청할 만큼 관심을 모았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은 부천노동영화제 또한 이 작품을 초청해 상영하였는데, 영화 가운데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에피소드가 여럿 등장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포스터
ⓒ 부천노동영화제
 
한국 독립영화계가 빚은 여섯 가지 시각

<말이야 바른 말이지>는 총 러닝타임 68분짜리 영화다. 별개의 다수 에피소드를 한 데 묶은 옴니버스 영화로, 제목이 뜨기 전 '프롤로그' 연출을 맡은 윤성호를 필두로 김소형, 박동훈, 최하나, 송현주, 한인미까지 모두 여섯 명의 감독이 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찍었다. 상업영화계에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얻었어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물러난 감독들이 짤막한 단편 연출로 관객과 만난다는 점에서 이들의 가능성을 탐구할 기회로 볼 수도 있겠다.

여섯 감독 중 단연 중량감이 있는 연출자는 역시 윤성호다. 독립영화 깨나 본 이들 중에선 윤성호라는 이름을 아는 이도 제법 있을 만큼 알려진 감독이라 하겠다. 2004년 발표된 단편<우익청년 윤성호>는 마이클 무어를 연상케 하는 재기발랄한 다큐멘터리로 화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은하해방전선>이며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등 독특한 작품세계를 이어왔다. 대단한 성취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가능성에 목말라 있던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는 평가할 수 있겠다.

윤성호가 연출한 프롤로그는 카페 창가자리에 앉은 두 남자의 대화로 꾸려진다. 이들의 대화 도중 수시로 옛 예능프로그램에서나 썼을 방청객 웃음소리가 덧입혀지는 게 특징적이다. 둘은 대기업 직원과 하청업체 관계자로 보이는데, 직원을 부리고 노조를 무력화하는 방법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주로 하청업체 관계자가 대화를 이끌며 대기업 직원이 간간이 의견을 피력하는 식이다. 더없이 저열한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들의 발언마다 입혀지는 웃음소리는 블랙코미디적 조롱을 의도하는 듯도 하다.

영화의 제목이 뜨기 전 다짜고짜 시작하는 프롤로그가 대체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또 다른 단편과의 상관관계는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적 완성도에 있어서도 첫 순서라는 중대한 역할에 비해 별반 효과를 발하지 못해 실망스럽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미묘한 대화 속 드러나는 메시지

두 번째 작품은 김소형의 <하리보>다. 독일제 유명한 젤리의 이름이기도 한 하리보는 영화에선 고양이의 이름이다. 이야기는 동거하던 한 커플이 헤어지며 키우던 고양이의 양육자를 정하는 내용이다. 꽤 현실적인 설정에 더하여 다분히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나누는 과장된 대화가 일말의 흥미를 자아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를 이루는 다른 에피소드들이 비교적 명확한 사회적 주제의식이 있는 반면, <하리보>에선 메시지를 명확히 짚어낼 수 없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억지로 확대해 해석하자면 애완동물을 쉽게 내버리는 이들의 소식이 공공연히 들려오는 요즈음의 세태와도 연관지어볼 수 있겠으나, 영화가 이를 의도했는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의미를 구조화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세 번째는 박동훈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다. 아버지와 임신한 딸이 나누는 대화로 풀어가는 영화로, 제가 가진 혐오와 편견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들의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 포착한 블랙코미디다. 캐스퍼를 생산하는 광주 현대차공장의 광주형일자리 정책으로 이사를 가게 된 딸 내외를 아버지는 걱정한다. 그가 걱정하는 건 다름 아닌 손자의 출생지다. 이사를 간 곳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고향은 광주가 된다. 아버지는 오래된 전라도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며 아이의 출신지가 광주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 사라진 것 같아도 사회적 인식이란 것이 있다고 딸을 설득하려 든다.

딸은 시종 아버지의 말이 과거의 유산이며, 그와 같은 혐오와 편견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부에 마련된 반전을 통하여 딸 역시 심각한 편견과 혐오를 아무렇지 않게 표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혐오발언과 반박이 거듭되는 대화로 메시지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이 단편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명확한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다만 반전이 지나치게 빤하여서 눈 높은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무리가 따른다.

연출을 맡은 박동훈은 최민식 주연의 2022년 작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연출하기도 한 감독이다. 75억 원 가량의 제작비를 투여한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혹평과 함께 손익분기에 크게 못 미치는 50만 관객으로 상영을 마무리한 바 있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민감한 소재도 영화 안으로

최하나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진정성 실전편>은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품일 수 있겠다. 영화는 반려견 식품을 유통하는 업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남성혐오 논란에 대응하는 업체의 홍보관계자들이다. 이 업체의 한 직원이 제품을 홍보하며 개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허버버버법'이란 표현을 써가며 묘사한 것이 논란의 계기가 됐다. 업체는 책임을 물어 직원을 해직시킨 상태로, 남은 직원들이 사과문을 작성해 일어난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려 한다.

사과문 초안은 부하직원이 작성하고, 팀장은 <내부자들>의 논설실장을 연상시킬 만큼 교묘한 방식으로 단어를 골라가며 글을 손본다. 그 과정에서 불거지는 민감한 대화가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 말하자면 부하직원은 '허버버버법'은 혐오와 전혀 상관없는 단어이고, 그 모태로 오인되는 '허버허버'며 '오조오억' 또한 혐오용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인터넷 상에서 태어난 신조어인 '허버허버'는 그저 허겁지겁 무엇을 먹는 모습을 가리키는 가치중립적 용어일 뿐이고, '오조오억' 또한 무엇이 아주 많은 상태를 가리킨다는 이야기다. 반면 팀장은 이를 자세히 따져보지 않은 채로 우선 분노를 잠재우는 일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이와 같은 단어의 탄생부터 용례, 덧씌워진 이미지에 대해선 논란 가능성이 있다. 영화는 이에 대하여 단어가 어디까지나 가치중립적이라는 입장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하여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팀장의 무책임함과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를 밖에 없는 합리적인 부하직원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영화의 선택을 누군가는 일부 페미니스트의 치우친 견해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황이 주는 우스꽝스러움에 집중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감상일 테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사회의 문제를, 나의 노동을 돌아보는

영화는 송현주 감독의 <손에 손잡고>와 한인미 감독의 <새로운 마음>으로 이어진다. 이중 한인미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개별적 옴니버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만큼 긴장감이며 영화적 효과가 개중 눈에 띄는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정 대리를 연기한 이태경 배우의 섬세한 연기는 영화 전체 가운데서 각별히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야근 중 김 팀장과 정 대리가 야식을 먹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김 팀장이 집에서 싸왔다는 야식은 전날 집에서 먹다 남긴 것이 분명해 보이는 눅눅한 탕수육이다. 다른 직원들은 배가 고프지 않다며 오지 않은 가운데, 오로지 정 대리가 그와 자리를 함께 한다. 정 대리는 그간 받아들여지지 않은 업무 관련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고 김 팀장은 사적인 질문을 퍼부으며 요구를 묵살한다. 권력관계를 이용해 선을 넘는 남성 상급자의 태도는 이내 직장 내 성폭력 문제로 이어지며 현실 세계 가운데 존재하는 부조리를 일깨운다.

기존 다른 영화가 지루하며 단선적인 전개, 모호하거나 뻔한 문제의식으로 아쉬움을 남긴 데 반하여 <새로운 마음> 만큼은 극중 효과적인 장치로 관객의 정신을 확 잡아끈다. 배우들의 살아 있는 연기가 잘 쓰인 대사와 어우러져 얼마간 긴장을 일으킨다.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설정 또한 잘 살려낸 단편으로 노동과 남녀갈등, 권력형 범죄의 문제를 여러모로 짚어낸다고 하겠다.

전반적으로 <말이야 바른 말이지>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를 각각의 감독이 두루 살펴 각 10여 분의 짤막한 영상으로 포착하려한 작품이다. 일부는 성공하고, 또 일부는 실패한 시도들이 거듭되는 가운데 적어도 관객은 제 삶과 주변의 문제를 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의 미덕 중 하나는 실패가 쉽게 복구된다는 점이다. 실패는 성공의 자양분이 된다는 격언처럼 영화 속 아쉬움은 내일의 나아짐을 위한 기반이 될 수 있겠다. 관객이 그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이유다.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의 선택으로, 영화 가운데 자리한 노동에 주목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테다. 노동이란 말 한 마디로 정리되지 않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것으로, 누군가는 권력을, 고용의 지속을, 정부의 지원을, 감정의 소모를, 삶의 영위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로부터 나의 노동을 돌아볼 수 있다면 이 영화에 의미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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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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