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흠뻑 빠진 하루, 기형도 문학관에 다녀오다

박태신 2023. 11. 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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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라, 모두 살아 있으라' 외친 시인 기형도

[박태신 기자]

지난달 28일 '기형도 문학기행' 가기 며칠 전, 쌀쌀한 날씨가 한몫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물류센터엔 짙은 안개가 깔렸고 비도 내렸다. 그 덕분에 나는 큼지막한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져 거리를 덮은 가을 단풍 길을 올해 처음 걸을 수 있었다. 기형도의 시 '안개'가 떠올랐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안개' 중에서)

책장 구석에 꽂혀있던 <입 속의 검은 잎>
 
▲ 『입 속의 검은 잎』 초판본. 시인이 숨진 해에 나왔고, 김현 평론가의 추천 덕분에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 박태신
 
KTX를 타고 지하로만 지나갔던 광명(철산역)을 처음 방문했다. 서울 서쪽 끝에 사는데도 생각보다 가까웠다. 7호선 지하철 안에서 기형도 시인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의 김현 평론가 해설을 읽었다. 내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 있었던 1989년 초판본이다. 문득 과거 구입해 읽었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그때 나는 김현 평론가가 해설에 사용한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에 움찔움찔 호기심이 생겼었다. 시를 읽어 보면 '괴이하다'라는 뜻의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게 적확해 보였다. 우울, 죽음, 절망 등이 가득한 시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해설 본문은 원래부터 시인이 생전에 시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을 때 김현 평론가가 일부 써놓은 것이리라 추측한다. 그리고 중간에 기형도 시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이를 탄식하는 내용이 해설 맨 앞쪽과 맨 뒤쪽에 급작스레 덧붙여졌을 것이고.

김현 평론가는 기형도의 시가 '그로테스크'하다고는 봤어도 시인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나 보다. 해설에 그와 관련해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는 게 내 첫 반응이었다"라고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 기형도 문학관 문패 시인의 서쳬를 본따 만들었다.
ⓒ 박태신
 
기형도 기행 일정을 가기 전 내가 놀란 점은 '기형도문학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시를 쓴 것도 아니며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그 시도 도저한 괴이함이 가득한데 문학관이라니, 놀라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학관은 비교적 최근인 2017년에 개관했고, 그동안 지인과 후배들, 많은 문학가들이 물밑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광명시도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노력을 기했을 것이다. 그렇게 상자에 넣어져 내다 버려질 뻔한 유품들이 살아남아 전시되고 있었다. 유품을 대신해, 시를 형상화해 설치 미술 작품이나 조형물로 조성한 공간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생전에 남다른 필력과 사상, 인품을 갖추고 치열하게 살았으며,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유일무이한 시를 남긴 것이 문학관 설립의 주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기형도문학관은 지역문화의 중추적인 장소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땐 문학관 마당에서 풍물패들의 흥겨운 연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3층 강당은 이런저런 모임에 대관을 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우리가 걸은 '기형도 시 길'은 문학 산책로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시인의 친누나이자 명예 관장인 기향도 님의 설명을 듣고, 전시장을 들러보고서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도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토포포비아... 절망과 희망 사이 
▲ 기형도 시인. 문학관에서 훤칠하고 미남인 그의 얼굴을 큼지막한 사진으로 다시 본 나는 그의 얼굴이 음울한 시와 접목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 박태신
 
책이 가득한 흰색 톤의 문학관 도서실에서 기형도에 대한 작가론과 작품론 설명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신문사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긴 것은 기형도 시인에겐 물 만난 물고기 형국이었다. 좋은 기자보다는 좋은 문학가가 되고 싶다고 했단다.

기형도가 자신의 시에 대한 당대 최고의 평론가 김현의 월평 원고를 받고 당황했다던 내용, 우여곡절 끝에 신문에 실었다는 내용은 내겐 전설 같은 이야기로 들렸다. 기형도의 죽음을 애석해 한 김현 평론가 그분도 이듬해 1990년에 돌아가셨다. 서울대학 병원에서 진행된 그분의 장례식에 나도 다녀왔다.

한편, 이날 작품론 내용 중에 '토포포비아'라는 낯선 단어가 있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추억 어린 장소가 담긴 사진을 보며 감응에 빠지는 것을 '토포필리아'(장소애, 즉 특정 장소에 대한 애정)이라고 한단다. 그와 반대로 특정 장소에 대한 혐오적 정서를 갖는 것을 '토포포비아'라고 부른다고.

이날 작품론 발표자는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라는 시 속, 어느 관공서 유리창으로 보이는 곳에서 혼자 울고 있는 한 공무원을 예로 들고 있다. 반복적인 일상이 끔찍할 만큼 동일해서,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을 지옥으로 느끼는 '토포포비아'를 형성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공무원은 사회 구조 속에 매몰된 우리들을 대변하는 것일 수 있겠다.
 
▲ 유품 만년필. 기형도 시인이 생전에 사용한 파이롯트 만년필.
ⓒ 박태신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 속 많은 주인공들은 길을 떠날 준비를 하거나 떠나고 있는 중이다.  시를 읽는 내 눈엔 그들 행로 속에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울과 낙망이 가득했다. 기 시인은 그런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고 했고, 그건 고통이지만 그 고통을 사랑한다 했다.

그런데 발표자는 "가장 심각하게 절망함으로써 희망의 존재를 희미하게 환기시킬 수 있"다고 했고, 그래서 작품론 제목을 <부정성과 희망의 변증법>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뜻밖의 발상을 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神(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不在(부재)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쉴 것이니……
('포도밭 묘지2' 중에서) 

문학관 근처의 '충현박물관'과 '광명동굴'도 관람하고 다시 철산역으로 왔다. 지하철을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빈집'(기형도 시인의 대표 시)처럼 각자 자기의 빈집을 향해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문을 잠그고 추억에 잠기며 이 글을 썼다.

이 글의 제목은 시인의 시 '비가 2'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외친다. 이 기사가 조금이나마 기형도 시를 좀 더 알리고 '기형도문학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형도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전하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한편 기형도 시인의 시 중엔 서정성과 경이로움이 듬뿍 느껴지는 시도 여럿 있다. 그중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저녁 노을이 지면
神(신)들의 商店(상점)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성)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사원)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성)

어느 골동품 商人(상인)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숲으로 된 성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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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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