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탄생의 역사에는 성폭력이 있다
[이은영 기자]
지난 4일 새벽 4시 경남 진주에서 20대 남성이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여성의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는 맞아야 한다며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남성연대라고 자신을 소개한 가해자는 자신을 말리던 50대 남성까지 폭행했다. 가해자가 이해한 페미니스트와 남성연대는 과연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나는 지난 11월 2일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홀에서 열린 [세계 작가와의 대화 X 르 클레지오]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평일 퇴근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는 타이틀의 위력을 과시하듯 객석은 이미 만원이었다.
200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1940~)는 오랜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라고 불리는 그는 <신화와 문학>이라는 주제로 신화와 문학의 차이점에 관해 작가의 시선을 들려주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은 개인의 창작물이지만 신화는 집단의 창작물이라고 했다.
르 클레지오는 미리 준비해 온 ppt를 보여주며, 동시에 A4 용지에 써 놓은 내용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서양 문화 곳곳에 자취를 남긴 고대 그리스의 신화 중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성폭력'이라는 주제로 몇 가지 작품을 보여주며 설명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상징은 '근친상간', '친부 살해', '모친 성애'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탄생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성폭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와 결혼하는 운명을 타고난 테바이의 왕이다.
▲ 르 클레지오가 설명하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4~ 1620년, 캔버스에 유채, 199x162.5cm, 우피치 미술관. |
ⓒ 이은영 |
르 클레지오가 보여준 미술 작품 중에는 실제로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에게 성폭행당한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킨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20>가 있었다.
17세기 당시 한 여성이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를 법정에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을지 상상하면 참담한 심정이 된다.
400년 전 로마에서 성추행을 당한 여성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고문을 당해야 했다. 젠틀레스키는 자기 작품을 통해 힘으로 여성을 괴롭히는 나쁜 남자를 정당하게 벌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정신적 충격과 분노를 캔버스에 쏟아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현대판 '미투(Me Too) 운동'에 해당한다. 미투 운동은 2017년 10월에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30년간 영화사 직원은 물론 배우, 모델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일으킨 성범죄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시작됐다.
오늘날 미투 운동은 인터넷의 발달로 미국을 넘어 80개가 넘는 나라로 빠르게 확산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성추행 및 성폭행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도록 허용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데 초석을 다졌다.
그 결과 2018년 대한민국 현직 검사가 가해자 안태근(전 법무부 국장)으로부터 자신이 겪은 성추행을 직접 폭로하며, 현대 사회에 성폭력이 이토록 만연하다는 사실에 대중이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잇따라 성폭력이 문제 제기된 분야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스포츠, 미디어, 대학, 군대, 가정, 종교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곳이 해당했다.
이처럼 소중한 개인의 인권과 자아존중감을 되찾기 위해 시작된 미투 운동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하나의 조직체로서 연대하여 또 한 번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을 갈라치기 하며 혐오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지위와 힘을 악용하여 성범죄를 일으키는 가해자를 고발하는 태도다. 이것은 성폭력이 단지 남성이 여성에게만 가하는 폭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성폭력이 발생한 원인과 이유가 피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뒤틀린 성인식을 가진 가해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 교보 인문학 X 세계 작가와의 대화 200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1940~) |
ⓒ 이은영 |
<신화와 문학>에 관해 준비한 이야기를 마친 르 클레지오는 자신의 아버지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가족을 위해 요리하며 어머니와 함께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린 르 클레지오에게 남자도 여자와 똑같이 집안에서 요리와 빨래, 설거지와 육아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단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어머니는 퍽 난감해하셨는데, 혼자 사는 어머니는 요리에 소질이 없으셨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올해 83세인 르 클레지오 작가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놀라운 이야기다. 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고도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이유에 관해서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마치 비슷한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요리를 하는 것과 같아요. 작가는 결국 자기가 가진 이야기를 비슷하게 반복하며 쓰는 거예요."
그렇다. 작가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고, 교육받고, 생각하고 상상하며, 인간관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세상을 되풀이하며 이야기를 쓴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해 세상의 많은 작가들이 앞으로 쓰게 될 문학은 또 다른 신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대를 막론하고 집단의 창조물은 종교와도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인간의 삶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가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세상을 통찰하며 자기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세상에 내어놓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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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은영 기자 브런치에도 함께 올라갈 예정입니다. https://brunch.co.kr/@yoconis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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