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달러 환전인데 지갑에 들어가지 않는 돈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리우를 떠나 향한 곳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리우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지도로는 가까워 보였지만 비행기로 세 시간은 가야 했습니다. 남미 대륙의 거대한 크기를 실감했습니다.
저녁에 숙소에 도착했고, 다음날 바로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정부의 환율 통제가 심한 국가입니다. 덕분에 정부가 고시하는 공식 환율과 실제 환율이 2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한국에서 발행된 카드를 사용해도 공식 환율이 아닌 암환율이 적용될 정도로 아르헨티나의 암환전은 보편적입니다. 덕분에 여행자들은 공항을 비롯한 공식 환전소보다는 다른 곳에서 환전을 하게 되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큰 거리로 나가자, 길 입구에서부터 '깜비오(Cambio, 환전)'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안내해 준 환전소에서 환전을 했습니다.
▲ 환전을 하고 받은 페소화 |
ⓒ Widerstand |
물론 아르헨티나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죠. 아르헨티나는 한때 남아메리카 대륙을 선도하던 경제 대국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아르헨티나는 1810년 호세 데 산 마르틴의 혁명으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오랜 기간 각 지방 사이의 내전을 겪었죠. 한때는 브라질과도 전쟁을 치렀습니다.
▲ 산 마르틴의 검. 좁은 박물관이지만 군인이 검을 지키고 있었다. |
ⓒ Widerstand |
현재 아르헨티나는 세계 4위의 소고기 수출 국기입니다. 다른 고기의 수출도 순위권에 들죠. 농업도 발달해서, 콩이나 보리, 과일류의 수출도 세계적인 규모입니다. 아르헨티나는 목축업을 기반으로 쌓은 자본을 산업 역량에 투자했습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최초로 근대적 산업화를 이룬 국가가 되었죠. 특히 1910년대는 그 전성기였습니다.
사회적인 진보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의 권익도 크게 성장했고, 학생운동도 발전했죠. 유럽의 68혁명에서도 1910년대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대학의 운동이 적극적으로 참고되었을 정도입니다.
아르헨티나는 내전이 끝나고 25년 만에 GDP를 7배 이상 성장시켰습니다. 총 GDP로도 브라질이나 멕시코를 따돌리고 남미 최대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인구는 많지 않았지만, 1인당 GDP를 비교하면 서유럽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 아르헨티나의 국기 |
ⓒ Widerstand |
물론 당시에는 모든 선진국이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위기는 다른 나라의 것보다 더 심각했죠. 무엇보다 문제는 정치적인 면에 있었습니다. 경제 위기를 틈타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독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혼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한 한 명의 정치인이, 지금까지 아르헨티나의 정치를 좌우하고 있는 인물이었죠. 바로 후안 페론입니다.
후안 페론은 군인 출신의 정치인입니다. 1943년 쿠데타에 동참해 정부 요직에 들어섰죠. 1945년에는 부통령이 되었고, 이듬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후안 페론과 그의 아내 에바 페론은 국민들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1955년 쿠데타로 쫓겨났지만, 페론에 대한 지지는 아르헨티나 안에서 결코 축출될 수 없었죠. 그는 결국 1973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사망했지만, 세 번째 아내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후안 페론의 정치 이념이었던 '페론주의'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흔히들 페론주의를 포퓰리즘과 단순히 등치시키기도 하죠. 하지만 포퓰리즘이라는 말만으로 페론주의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포퓰리즘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으니까요.
페론주의는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적극적인 빈민 구제책을 선호합니다. 국가가 경제에 깊숙히 개입해 중산층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렇게 보면 페론주의는 계획경제를 추구하는 좌파적 경제 이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페론주의는 가톨릭에 기반한 가부장적 보수주의를 추구합니다. 강력한 공동체주의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죠. 그 정치조직 역시 매우 수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의 흉상 |
ⓒ Widerstand |
사실 후안 페론의 집권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1946년 집권해 1955년까지 재임했을 뿐이니까요. 1973년에 돌아왔지만, 그는 이미 70대 후반의 나이였습니다. 실제로 집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죠.
하지만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나아가 남미 정치 전체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 정치는 페론주의와 반페론주의로 양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후 들어선 남미의 좌파 정권에게 페론주의가 중요한 선례가 됐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후안 페론을 축출한 군부 독재 세력의 무능은 페론주의에 대한 향수를 남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는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잔인한 반대파 탄압 정책을 벌였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이 탄압 과정에서 수만 명이 국가에 의해 납치되고 살해당했죠.
그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과 사건 조작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재판도 없이 비행기에서 산 사람을 던지는 방식으로 수많은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살해된 사람들의 자녀는 역시 납치해 군부 인사들에게 입양시키기도 했습니다.
▲ 에바 페론의 묘지 |
ⓒ Widerstand |
아르헨티나는 현재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페론주의를 지지하는 집권당이 서 있고, 반대편에는 중앙은행의 폐지를 주장하는 극우파 후보가 서 있죠.
둘 중 어느 쪽이라도 현재의 아르헨티나에 구원자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아르헨티나를 넘어 남미 전체의 정치에도 의미를 남길 수 있겠죠.
'남미의 파리'라 불리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전성기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넓직한 도로에는 그 시절의 향수가 짙게 묻어 있는 듯합니다.
여전히 50년 전 죽은 페론의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습니다. 독재의 그림자도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다. 에바 페론의 묘지 앞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꽃을 두고 갑니다.
꽃다발이 놓인 에바 페론의 묘지 앞에서, 여전히 아르헨티나 정치의 과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받아들었던 두꺼운 돈다발은 아직 생생히 살아있는 과거가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다만 아르헨티나 정치에 남은 역동성만이, 이 긴 과거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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