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어휘로 운율 살려 언어유희, '라임 글쓰기' 아시나요

안준철 2023. 11. 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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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박희연 작가의 <라임 딕셔너리>

[안준철 기자]

▲ 책 표지 박희연(샘별) 작가가 라임 에세이집으로 <라임사전>(2019) <라임의 말들>(2021)에 이어 <라임딕셔너리>(2023)를 펴냈다.
ⓒ 안준철
"장난감, 난감, 단감, 안감, 만감, 정감
나는 당신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당신의 태도가 저를 난감하게 함을 겨우 고백합니다. 차라리 단감이 되어주시면 안될까요? 혹은 안감처럼 저를 안에서 감싸주시는 건 또 어떻구요. 만감이 교차하는 이 대목에서, 당신의 정감이 저를 따스하게 덮혀 줄 순간을 꿈꿔봅니다." - 책 105쪽

박희연(샘별) 작가가 전라남도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라임(럭셔리)딕셔너리>를 펴냈다. <라임 사전>(2019년)과 <라임의 말들>(2021년)에 이은 세 번째 라임 에세이집이다. 라임 글쓰기는 운율을 담는 짧은 글쓰기로, 위 내용은 그 중 하나다.

시작된 어휘를 비슷한 결의 어휘와 같은 음보로 배치하고 의미의 변용을 즐기며 운율을 형성해가는 작업이다. 하나를 더 읽어보자. 

"끄트머리, 지느러미, 진절머리, 주변머리, 낙종머리
끄트머리라는 단어는 참 오묘하다. 끝부분을 주로 의미하지만, 일의 실마리를 뜻하기도 한다. 끝과 머리(시작), 알파와 오메가를 다 담고 있는 끄트머리를 여러 차례 주억거리며 조상의 슬기로움에 경탄을 해본다." (172쪽)

그는 "(지느러미는) 물의 흐름을 제어하면서 추친력 있게 이동하며 균형감을 주는 여러 역할을 그 하나가 해낸다는 것이 경이롭다. 지느러미의 끄트머리에서 물끄러미 응시한 결과물인 말꾸러미를 내밀어본다"고 라임 글쓰기를 갈무리한다. 박 작가는 "지느러미라는 단어도 놀랍다"고 하는데, 나는 그녀의 언어 감각에 경탄하고 놀란다.

박 작가는 책에서 언젠가 나희덕 시인의 북토크에 갔던 일을 회상해서 쓴다. 작가는 거기 간 뒤로 "나의 얼음은 따스히 녹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말하자면 따스히 녹기 전 박 작가는 차가운 얼음이었던 것! 그 얼음이 풀리는 과정이 책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컴컴했던 어둠으로 가득했던 날들이 있었다. 나를 소멸해야 마땅한 존재로 상정해놓고 자학이라는 방망이로 난도질했던 나날이 '있었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그 모든 어둠과 우울함을, 그때 그랬노라고 과거형으로 감정의 동요 없이 이야기하는 내가 현재 존재함을 나는 묵직하게 느끼고 있다."-<책 뒤표지 글> 중에서

박 작가는 그날 나희덕 시인의 열정에 반한 모양이다. 강의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운율을 담은 짧은 글을 쌓아가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희덕이란 이름에 "화덕"이라는 라임을 얹혀 다음과 같은 라임 글쓰기를 한다.

"희덕, 화덕, 겉, 곁, 응달, 옹달샘

/희덕이란 이름의 화덕에 언 마음을 녹입니다.
겉에 아닌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응달의 옹달샘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8쪽)

시낭송 콘서트에서 만난 작가

박희연 작가를 지난 달 '여순 10.19 시낭송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행사를 마치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식당을 나오는데 배낭이 묵직했다. 박 작가가 나에게 선물한 두툼한 두 권의 책 때문이었다. 한 권은 <라임 딕셔너리>이고 또 한 권은 첫 장편소설 <윙이자랑>이었다. 윙이자랑은 '자장가'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이 소설은 제주 4.3을 다루고 있다.

박 작자는 "전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순천대학교 사학과 석사를 다녔으나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석사에 다시 입학해 역사와 문학의 접점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알아가고 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하지만 그녀의 라임 글쓰기를 읽다 보면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작가는 "함부로" 살고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녀 곁에는 "함께 하자"는 이들이 있었다.

"함부로, 함께

/함부로 살지 않고 함께 살래요/

함부로 포기를 논하던 내가 있었다. 하기 전부터 지레 겁을 먹고 다가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나. (때로) 세 끼 밥을 먹으며 생을 지탱하는 것조차 '지겨워서' 주어진 생마저도 포기하고 싶었던 내가 있었다. 그러던 나의 태도를 고쳐갈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이들 덕분이었다." (39쪽)

박 작가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오랜 역사학의 우물에 있었지만 역사학 특유의 건조함과 논리정연함은 도통 적응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고 토로한다. 그러한 박 작가에게 시는 "시시하지 않은 사사로움"을 일깨워주었고, 차츰 "역사와 문학 사이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찬란과 혼란 사이에 있는 듯도 하다.

"관계 맺음 속에 성장 중"

"찬란, 혼란, 소란, 뒤란

/찬란도 혼란도 소란도 아닌 뒤란-
뒤란에서 꿈이 자라듯 초록이 자라듯
찬란과 혼란 속 자라나는 중인 저는
이제 뒤란에서 도란도란
우정과 애정을 키워갑니다/" (34쪽)

만학도로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에 있는 박 작가는 "직장과 대학원, 전남문화재단 지원사업, 시민기록가 과정을 병행하며 내 생애 역대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평하면서 "아직도 내 삶의 지향점이나 불투명한 미래를 떠올리면 혼란스러워지지만, 그럼에도 꿈과 초록이 자라는 뒤란이 있기에 도란도란 관계 맺음 속에 성장 중"이라고 말한다.

또한, "과거의 상처에 갇혀 더 이상 성장을 포기한 채 멈춰 버리는 것, 혹은 과거의 잘못을 들추며 시간을 보내는 태도를 최대한 지양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멈추지도 들추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상대와 발걸음을 맞추어간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지만 온전히 빛이 되어, 당신과 덩실덩실 춤출 날을 기약해본다"라고 말한다.   

"멈추다, 들추다, 갖추다, 맞추다, 비추다, 춤추다

/멈추지도 들추지도 않을 거야.
갖추고 맞추어 갈래
그렇게 비출래
춤 출래/" (142쪽)

그녀에게 '라임 글쓰기'는 "묵혀두었던 감정들을 직면케 해주며(분풀이, 화풀이) 응어리진 한을 녹여내는 굿판(본풀이, 살풀이, 한풀이)"로서 기능을 하기도 한다. "과거를 곰곰 곱씹어 되새김질하는 시도이기도 하고(문제풀이, 뜻풀이) 심심할 때면 나는 라임과 놀기 딱 좋은 시간"으로 여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라임을 매개로 바라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장(소원풀이)"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원규 시인은 책 추천사에서 "글을 업으로 쓰고자 하는 이는 자신만의 '시어 사전'이나 '언어 사전'이 필요하다고 점에서 박 작가의 <라임 딕셔너리>는 아주 소중한 결과물"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면서 "하지만 사전은 사전이요, 나열적인 언어유희 또한 문학의 밑바탕일 뿐이다. 그리하여 더 큰 도약의 창작 세계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애정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아쉽게도 이 책은 알라딘을 비롯한 인터넷 서점에 올라와 있지 않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서 박 작가에게 물어보니 "지역 출판사와 하면서 사실 판로에 대한 모색은 힘들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희망적이었다.

"라임 사전 컨셉은 제가 시초일 거예요. 찾아도 안 나오더라고요."

나는 박 작가의 라임 글쓰기가 큰 작가로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의 라임 글쓰기는 징검다리이자 목적지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박 작가도 그런 생각이 있는지 "본격적으로 라임 전업 작가가 되면 어떨까, 그런 행복한 상상도 해본다"고 한 라임 작품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이제는 "너무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슬쩍이는" 그녀가 보고 싶기도 하다. 나도 비교적 가벼운 느낌이 드는 그녀의 라임을 소개하면서 글을 갈무리할까 한다.  

"슬쩍, 소쩍, 훌쩍, 비쩍, 부쩍, 펄쩍, 번쩍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슬쩍이고 싶다. 소쩍궁소쩍궁 우는 소쩍새를 따라 국화와 누이의 그윽한 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훌쩍훌쩍 울거나 비쩍 마른 내가 다시는 되고 싶지 않다. 부쩍 성장하여 펄쩍 날고 싶고, 번쩍이고 싶다." (159쪽) 

박희연(샘별) 작가의 세 번째 <라임 딕셔너리>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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