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깨알 같은 묘사에 담긴 일상과 그 너머의 세상 그린 일리야 밀스타인

한은정 2023. 11. 6. 07: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독특하면서도 뭔가 익숙하고 어디선가 많이 본 것만 같은 느낌의 일러스트가 눈에 띕니다. 잘 모르는 새 여러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한 작품들을 봤기 때문일 수 있는데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은 뉴욕 타임스, 구글, 페이스북, 구찌, 등과 같은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급부상한 작가죠. 최근 한국에서는 LG전자의 광고를 통해 작가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게 됐어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은 놀라운 디테일과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호주 멜버른에서 자랐으며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일리야 밀스타인은 놀라운 디테일과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그 경이로운 디테일에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묘한 울림을 주는 요소가 있는데, 이는 그가 뉴욕을 넘어 세계적으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게 했죠.

그 인기와 특유의 화풍을 서울 강남구 대치동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일리야 밀스타인: 기억의 캐비닛’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하는 국내 첫 대규모 특별 기획전으로, 그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타인과 우리가 사는 세계로 다다르는 여정의 네 개의 섹션을 각각의 ‘캐비닛‘으로 은유하여 보여주죠. 한영지 마이아트뮤지엄 큐레이터는 “일리야 밀스타인의 놀랍도록 자세한 묘사와 독창적인 맥시멀리즘 화풍을 일러스트라는 상업 예술의 한 장르를 넘어 순수 예술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전시를 기획하게 됐어요”라고 설명했죠.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은 놀라운 디테일과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한 큐레이터는 그의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로 일상 속 간과할 법한 것을 놓치지 않는 특유의 통찰력과 상세한 묘사, 공감해내는 능력을 꼽았어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작품이 많은데요. 익숙하지만 묘하게 비현실적이거나 꿈처럼 아름다워 보이거나 때로는 약간 기이해 보이는 것은, 세상의 다양한 이면을 볼 줄 아는 작가의 눈과 독특한 미시적 세계관 때문이죠.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포착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세한 묘사와 다채로운 컬러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으며, 묘사하는 세상 너머의 것까지 그려내는 것이 일리야 밀스타인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장에서는 왁자지껄하고 복잡한 풍경의 그림들을 볼 수 있어요. 어수선하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로맨틱한 풍경이 펼쳐지고, 개인 서재의 모습에서부터 어디선가 마주한 듯한 대도시의 거리와 숲속 풍경까지 낯설지만 익숙한 모습도 볼 수 있죠. 캐비닛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작품을 통해 우리만의 캐비닛 속 어렴풋이 들어있는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캐비닛에 들어갈 만큼 작은 물건이지만 그 작은 것으로부터 관련된 수많은 기억을 소환할 수 있듯이, 일리야 밀스타인은 작은 것으로부터 세상을 읽어내며 그 경험을 감상자들에게도 선사하죠.

책으로 빼곡한 서재 한가운데서 지중해의 푸른 티레니아 바다를 응시하는 작가 본인을 그린 ‘티레니아해 옆 서재’. A Library by the Tyrrhenian Sea ⓒIlya Milstein

첫 번째 캐비닛 섹션에서는 단독 또는 둘의 인물이 등장하고, 두 번째 캐비닛에서는 가족 및 친구들과의 모습을, 세 번째 캐비닛에선 군중·번화가·공동의 장소 등을 묘사한 작품, 마지막 캐비닛에선 군중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순수 풍경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책으로 빼곡한 서재 한가운데서 지중해의 푸른 티레니아 바다를 응시하는 작가 본인을 그린 ‘티레니아해 옆 서재’ 작품의 제목을 따온 첫 번째 캐비닛은 그의 자아가 두드러지는 작품들과, 가장 가까운 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연인을 묘사한 작품들을 주로 보여주죠.

드러누워 음악과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이 ‘주말’이라는 제목과 잘 어울린다. Weekend ⓒIlya Milstein

‘주말’과 ‘늦오후의 휴식’이라는 작품이 눈에 띄는데요. 느긋하게 방바닥에 드러누워 음악을 감상하며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이 제목과 잘 어울립니다. 주말·휴식 시간엔 보통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요.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보내는 시간만큼 평화로운 건 없죠. 여유로움과 따스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 사이사이에서 발견되는 LG 로고의 가전제품들을 하나둘 찾는 것도 마치 보물찾기처럼 느껴져요.

LG전자와의 협업작 ‘쉬고 마시고 사랑하라’는 LG전자 가전제품과 호랑이, 산수화, 고가구 등 한국적인 요소를 찾는 재미가 있다. Relax, Drink, and Love ⓒIlya Milstein

이렇게 브랜드와 협업한 그림들은 각 브랜드의 특성을 살리는 동시에 그의 스타일을 잃지 않은 게 특징입니다. ‘쉬고 마시고 사랑하라’는 ‘하루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제로 제작된 LG전자의 2022년 컬래버레이션 작품인데요. 커플 뒤편에는 앙리 마티스, 르네 마그리트 등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걸려 있고 테이블 위아래에는 몇 가지 조각 작품들이 보이는데, 이는 작가의 실제 집에서 볼 수 있는 인테리어 요소와 흡사하죠. 이국적인 커플의 외형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 산수화, 고가구 등이 LG전자의 현대적 가전제품 디자인과 함께 배치돼 이색적인 조화를 보여줍니다. 그의 협업 작품들은 억지스럽거나 ‘광고구나’ ‘홍보용 작품이구나’ 같은 느낌이 들지 않죠. 빼곡하게 사물·인물·가구 등을 채워 넣으면서 브랜드 특색을 살리는 사물이나 로고 또는 포인트 컬러 등을 자연스럽게 섞는 균형 감각을 발휘합니다.

브랜드 구찌와 협업한 작품. 그의 협업 작품들은 브랜드 특색을 살리는 사물·로고·포인트 컬러 등을 자연스럽게 섞는 게 특징이다. Gucci ⓒIlya Milstein

‘다리’는 외국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링고’와 협업한 작품으로, 2021년에 새롭게 추가된 유대인의 언어 ‘이디시어’를 알리는 기사 ‘듀오링고는 이디시어를 언어 수업에 추가한다’에 실렸죠. 작품 한가운데 수직선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유대인의 모자인 슈트레이멜을 쓴 유대인들이 이디시어 간판이 있는 거리에 모인 과거의 모습을, 이와 반대로 오른편에는 유대 요리 크니쉬를 판매하는 빵집이 있는 현재 뉴욕 맨해튼의 모습을 그렸어요. 손을 맞댄 두 주인공 중 오른쪽 인물은 휴대전화로 듀오링고를 이용해 이디시어를 배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언어가 문화를 전승하고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다리’로서 전혀 다른 장소에 있는 두 사람을 연결해 주고 있음을 보여주죠.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 속 강한 색감의 건축물, 그 지역 특유의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Riviera Memories ⓒIlya Milstein

두 번째 캐비닛에는 그가 생활했거나 여행했을 장소의 풍경을 저절로 상상하게 하는 그림들이 많았어요.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과 ‘만케심 포수반 사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에서 보이는 지역색 강한 색감의 건축물, 그 지역의 기후가 엿보이는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또 다른 LG전자 의뢰작 ‘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을 보면 4인 가족과 고양이로 이루어진 어느 가족의 아침 식사 풍경을 다루죠. 서구적인 요리를 준비 중인 듯한 부엌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자세히 보면 LG 냉장고를 비롯해 한국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습니다. 냉장고 한 면에는 박카스·복분자·소주 같은 것들이 그려졌고, 목각 원앙 모형이나 호랑이가 그려진 청화백자 등을 찾는 재미도 있어요.

두 번째 캐비닛과 세 번째 캐비닛 사이에 마련된 포토존이자 특별 전시 공간인 ‘책거리’도 시선을 사로잡는데요. ‘티레니아해 옆 서재’와 동일한 모습을 배경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실제로 티레니아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책상 앞에 앉아볼 수 있게 구성한 공간입니다. 이 공간을 보고 작가도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요. “지난 6월 작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본 그의 책상 이미지를 참고로, 실물과 최대한 흡사한 기물로 책상을 연출했죠. 오프닝 하루 전, 작가는 이 공간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여기는 분명 한국인데 집에 와 있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앞선 섹션에서 살펴본 작품들을 작가가 드로잉한 작은 작품들도 살펴볼 수 있는데요. 작가의 오리지널 드로잉을 서재 풍경의 일부로 만나며 작가가 된 것처럼 서재에 앉아 기념사진을 남기는 걸 놓칠 수 없죠.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에선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로 보이는 인물도 찾을 수 있다. Evening in Soho, Summer 1983 ⓒIlya Milstein

세 번째 캐비닛에 걸린 작품들은 공동의 장소·군중·번화가 등 더 큰 외부 세계를 배경으로 하죠. 작가가 거주했던 뉴욕 맨해튼 도심의 거리 모습을 담은 그림들에는 여러 인종이 함께하는 미국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담겼고,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이라는 작품에선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로 보이는 인물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뉴욕에 기반을 둔 면도 상품 제조 회사인 ‘해리스’ 의뢰로 총 네 점 제작된 ‘상상 속’ 시리즈는 벨기에‧프랑스‧독일‧네덜란드의 도시 거리와 나라별 특징을 재치 있게 포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죠. 특히 ‘상상 속 벨기에’는 만화가 에르제의 캐릭터 땡땡(Tintin)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도시·나라별 특징을 잘 포착한 ‘상상 속’ 시리즈 중 ‘상상 속 벨기에’에선 만화 캐릭터 땡땡(Tintin)을 발견할 수 있다. A Belgian Fancy ⓒIlya Milstein

마지막 캐비닛에서는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작가의 신작들을 볼 수 있어요. 특정 인물이 그려지지 않음으로써 작품 속 장소는 감상자의 더 많은 상상과 이입을 유도하죠. 코로나19로 학교 수업이 대체되어 스쿨버스가 운영되지 않던 현실을 반영한 ‘잃어버린 여름’과 인류가 사라지고 나서 생존한 생명체들만 사는 세상이 온다면, 그 세계는 과연 어떨까 생각하게 하는 ‘인류 이후에 I’과 ‘인류 이후에 II’도 인상적입니다. 불곰 한 마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 하나가 동행이 되어 자연 속을 거닐고 있는데.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문을 던지죠.

인류가 사라진 세상을 그린 ‘인류 이후에 I’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After Man I ⓒIlya Milstein

한 큐레이터는 전체적인 작품을 둘러보며 일리야 밀스타인 특유의 ‘깨알 같은’ 묘사를 놓치지 말라고 전했죠. 책장 위 기린 인형의 발에 걸려 있는 구슬 팔찌, 먹다 남은 생선 가시에 어지럽게 붙은 살점들, 보도블록 틈 사이에서 핀 잡초와 민들레 꽃, 친구의 스커트 위에 그려진 하이힐 패턴, 책 사이 끼워진 조그마한 인덱스까지 친절히 그린 작가의 작품에는 작은 것들의 존재감과 매력이 두드러지는데요. 이러한 요소들을 작품 속에서 찾아보며 이들이 어떻게 작품을 특별히 만드는지 확인해 보세요.

■ ‘일리야 밀스타인: 기억의 캐비닛’

「 기간 2024년 3월 3일(일)까지(2월 10일 설날 당일 휴관, 공휴일 정상개관)
장소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518 섬유센터빌딩 B1층 마이아트뮤지엄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 40분(입장 마감 오후 7시)
관람료 성인 1만8000원, 청소년 1만4000원, 어린이 1만2000원

글=한은정 기자 han.eunjeong@joongang.co.kr, 사진=마이아트뮤지엄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