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카르텔 쫓다 미래 놓친다

2023. 11. 6.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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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숙 전 국회의원

R&D 예산 삭감은 성과 못내면
포기하란 메시지
길고 고단한 과학기술 연구
대신 의대 편입학하는 시절
정부의 잘못된 선택이 나라의
미래 기반 흔든다

윤 대통령, 힌튼 교수 만난 뒤
‘AI 세계 3위’ 목표 제시
AI 암흑기에 미래 보고 인내
끈기로 수십년 지원한 캐나다
우리도 연구자에 대한 예의와
존중부터 보여야

연구개발(R&D) 예산이 올해 국회 예산심의의 최대 이슈가 됐다. 1990년대 외환위기 속에서도, 여야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증가했던 R&D 예산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대폭 삭감됐기 때문이다. 국회 시정연설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은 뒤늦게 예산 삭감에 따른 고용 불안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여당도 청년연구원들의 처우 개선 예산을 증액하겠다고 거들었다. 한데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예산 삭감이 가져올 파장을 정말 몰랐을까.

폭풍은 각 대학 연구실에 불어닥쳤다. 예산을 삭감하면 어디서부터 지출을 줄일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인건비, 그중에서도 대학원생이나 박사과정 연구자들이 가장 약한 고리란 것을. 지난 두 달간 짐을 싸는 연구원들에 관한 보도가 이어진 이유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대폭 삭감’이란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선 고용 불안 대책을 꺼내 들었다.

지난 3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 ‘제1차 국가연구개발 중장기 투자전략’을 보고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심의·의결된 내용이었다. 2027년까지 5년간 R&D 예산을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으로 유지하고, 5년간 170조원을 투자해 2030년 과학기술 5대 강국으로 도약하겠다고. 그런데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아 결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정부의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5년간 R&D 투자는 145조7000억원으로 줄었고, 내년 R&D 예산도 5조원 이상 대폭 삭감된 것이다. 국무회의 보고 당시 과기정통부 장관이 공언한 것처럼 ‘중장기 투자전략’은 법에 따라 심의·의결된 최초의 법정 계획이다. 그럼에도 몇 달 만에 뒤집힌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6월 말 윤 대통령은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카르텔에 따른 나눠 먹기식 R&D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정부는 R&D 예산을 ‘중점 정비 분야’로 정했고 그 결과가 대폭 삭감이었다. 정부는 크게 두 가지 삭감 이유를 들었다. 가시적 성과가 미흡하고, 나눠 먹기식 소규모 사업이 난립한다는 것이다. 차마 ‘카르텔’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가시적 성과를 들고나온 것이겠지만, 중장기 연구를 지원하는 R&D 본래 취지에 크게 어긋나는 이야기다.

지난해 9월 캐나다를 방문한 윤 대통령은 인공지능(AI)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튼 교수를 만났다. 미국 등 주요 국가 정부들이 모두 AI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때 캐나다가 나섰고, 토론토는 지금 AI의 메카가 됐다. 힌튼은 미래를 보고 인내와 끈기를 갖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시적 성과’를 독촉하는 우리 정부에선 미래를 향한 인내와 끈기는 보이지 않는다.

R&D 예산이 문재인정부에서 10조원이나 대폭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40세 미만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도 대폭 늘었다. 당시 연구 예산을 복지 예산처럼 지원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말한 카르텔 때문이든, 가던 길만 가는 관성적 예산 편성 때문이든 이제 막 임용된 젊은 교수들의 경우 대부분 예산을 지원받지 못하던 상황에서 더 많은 이들이 지원받게 된 건 분명하다. 이를 나눠 먹기식 소규모 사업이라 지적한 것이라면 점검하고 조정하면 될 일이다.

정부 예산안은 그 자체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다. 가시적 성과를 앞세운 예산 대폭 삭감은 언제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듭된 실패를 딛고 애쓰는 연구자들에게 당장 성과를 못 내겠으면 포기하라는 격이다. 더욱이 카르텔이니 나눠 먹기니 같은 말은 일부 문제를 전체인 양 확대해 모두를 범죄자 취급한 모욕적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카르텔이 있다면 삭감이란 칼을 꺼낼 일이 아니라 정밀하게 조사 또는 수사부터 할 일이다.

그러잖아도 외롭고 고단한 연구자의 길 대신 의대를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이들이 나오는 시절이다. 정부의 거친 언사와 예산 삭감은 우리 연구자들에게 이미 깊은 내상을 입혔다. 예산의 일부 복원이나 고용 대책보다 우선돼야 할 것은 연구자들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다. AI 세계 3위 국가가 되겠다는 정부의 목표 역시 성과를 재촉해서 이뤄질 일이 아니다. 힌튼이 2006년 ‘AI의 암흑기’를 끝내는 신경망 알고리즘을 내놓기까지 수십년간 캐나다는 인내와 끈기를 갖고 지원했다. 필요한 건 인내와 끈기, 그리고 예의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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