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제조사가 ‘급발진 있다’ 인정해야 원인 찾아 해결
무혐의 처리된 강릉 급발진 사고
차가 비정상적으로 달리는 모습이 도로 주변 CCTV와 다른 차량의 블랙박스 카메라에 잡혔다. 사고 차량 블랙박스에는 당시 상황을 짐작게 하는 A씨 말이 저장됐다. “이게 안 돼”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는데도 속도가 줄지 않는다는 뜻으로 추정됐다. 전문가들은 영상과 음성을 근거로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가능성을 제기했고, 사건이 방송과 유튜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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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사망, 할머니 운전자 입건
경찰 최초로 EDR 증거 불채택
한문철 변호사 “자동차 제조사
결함 인정하는 계기가 되기를”
국회, 제조물 책임법 개정 추진
발의 법안 통과 여부는 불투명
」
하지만 A씨는 고의 또는 과실로 손자를 숨지게 했다는 혐의(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의 치사)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사고 차량의 EDR(사고 기록 장치)을 봤더니, 운전자가 사고 전 5초 동안(최대 저장 범위가 5초) 가속 페달을 밟은 것으로 돼 있다는 분석 결과를 경찰에 넘겼다. EDR 기록을 신뢰하면 A씨가 브레이크 페달 대신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가속 페달 밟았다는 정보 못 믿어
그런데 경찰은 지난달 17일 A씨에게 혐의가 없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고의 또는 과실로 보게 하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EDR 기록이 A씨가 계속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게 경찰 판단이다. A씨 변호인(하종선 변호사)은 EDR 기록에는 마지막 5초 동안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100% 밟아 차량 속도가 시속 110㎞에서 116㎞로 증가한 것으로 돼 있는데, 그렇게 ‘풀 액셀’로 밟으면 차량 속도가 최소 125㎞는 된다는 차량 전문가의 의견을 경찰에 제시했다. 경찰은 EDR 분석을 신뢰할 수 없다고 봤다.
수사에 열 달이 걸린 이 사건은 급발진 의심 사건에서 EDR 기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국내 첫 사례가 됐다. 그동안 경찰은 EDR 기록을 근거로 급발진 피해자로 보이는 운전자도 처벌받게 했다. 이런 점에서 ‘강릉 급발진 사건’이 주목을 받는다. 현재 A씨의 청구로 자동차 제조사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손해배상)이 진행되고 있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많은 시민은 자동차 스스로의 급발진이 있다고 생각한다. CCTV와 차량 블랙박스가 흔해지면서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영상이 계속 나온다. 하지만 자동차 제조사는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법원이 최종적으로 인정한 사례도 없다. 간격이 하늘과 땅이다. 최첨단 과학 시대에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한문철 변호사에게 물었다. 교통사고 전문 법조인인 그는 JTBC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한블리)’ 프로그램을 통해 강릉 사건을 널리 알렸다.
Q : 자동차 스스로의 급발진이 존재하는 게 확실하나.
A : “강릉 급발진 사고 블랙박스 음성을 들어 보면 도현이 할머니가 절박한 목소리로 손자 이름을 계속 부른다. 600m 이상을 그렇게 가면서 계속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보기는 지극히 어렵지 않나. 두 달 전 대구 택시 사고의 차량 내부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기사가 ‘큰일 났다. 이거 이거. 브레이크 잡았어. 시동 꺼도 안 돼’ 등의 말을 한다. 30년 이상 운전 경력의 기사가 착오로 2.5㎞를 달리는 동안 계속 브레이크 대신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보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목숨을 건진 승객이 택시기사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것을 눈으로 봤는데도 차가 질주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Q : 사고 당사자들이 차량 문제에 의한 급발진을 주장해도 경찰 수사에서는 대부분 운전자 과실로 결론이 난다. 왜 그런가.
A : “경찰은 통상 EDR 분석을 근거로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 않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결론 낸다. 그러나 EDR 정보로는 운전자가 실제로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엔진으로 들어가는 연료의 양을 근거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추정할 뿐이다. 차량의 전자 장치에 문제가 생겨 스스로 급발진한 경우도 운전자가 급가속한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급발진 사고 차량이 시속 100㎞ 이상으로 달리는 과정에서 과속 방지턱을 넘었을 때도 EDR에는 가속 페달을 계속 밟은 것으로 기록된다. 그 정도 속도면 방지턱에 차량 바퀴가 충돌할 때 운전자 몸이 순간적으로 위로 뜨게 된다. 페달을 계속 꾹 밟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경찰이 무분별하게 EDR 정보를 증거로 삼는 불합리한 관행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강릉 사고 수사에 큰 의미가 있다.”
Q : 어떻게 하면 차량 문제에 의한 급발진을 방지할 수 있을까.
A : “자동차 제조사가 ‘급발진은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를 찾고 해결할 수 있다.”
“브레이크 블랙박스가 억울함 방지”
Q : 제조사가 급발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인가.
A : “그들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지만, 자동차 회사 고위 관계자와 얘기를 해 보면 그들은 정말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운전자가 착오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내가 급발진은 분명히 있다고 말하면 잘못된 생각이라며 나를 설득하려 든다.”
Q : 운전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급발진 피해를 막을 수 있나.
A : “기술적 측면에서의 자동차 전문가들이 급발진 대처 요령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위험과 피해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은 없다. 자동차 제조사에서 원인을 찾는 게 중요하다. ‘급발진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문제 추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Q : 도현이 할머니가 손자를 죽였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은 것처럼 차량 운전자는 누구나 급발진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A : “지금까지 한국 법원이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을 확정판결로 인정한 경우는 한 건도 없다. 하급심에서 자동차 회사의 책임을 인정한 사례는 있는데, 대법원이 수년째 결론을 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막는 방법의 하나는 차에 ‘브레이크 블랙박스’를 장착하는 것이다. 사고 순간에 가속 페달이 아니라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다. 급발진 차량 운전자는 ‘나는 분명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경찰과 법원이 믿어주지 않는다’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브레이크 블랙박스는 이 문제를 해결한다. 현재 국내 차량 중 약 2000대 정도에 달려 있다. 아직은 차량 스스로의 급발진이 이것에 포착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았는데도 차가 급가속을 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확보될 것으로 예상한다.”
도현군 부친은 지난 2월 국회 입법 청원을 했다. 시민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정식 청원으로 채택됐다. ‘자동차 급발진 주장 시 입증 책임 전환’이 핵심이다. 현재는 운전자가 차량의 문제를 입증해야 한다.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법원에서 급발진이 인정되지 않아 온 이유다. 정우택·박용진·허영 의원 등이 자동차 회사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냈으나 공정거래위원회의 신중론에 막혀 있다.
토요타는 가속제압장치 장착
청원에는 ‘가속제압장치 미장착 시 결함에 의한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인정’도 담겨 있다. 강릉 사건 변호인인 하종선 변호사가 이 사건 전부터 주장한 것이다. 하 변호사는 “토요타·테슬라 등 해외 자동차 제조사는 차량 스스로 비정상적 급가속을 감지해 속도를 줄이는 ‘가속제압장치’를 개발해 장착했다. 기술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이것만 도입해도 급발진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급발진연구회 회장인 김필수 대림대 교수도 “급가속을 막아주는 ‘킬 프로그램’ 활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자동차 측은 “차량 안전과 관련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페달 오조작에 대한 제어 장치라 할 수 있는 가속제압장치도 대상 기술이다. 다만 각종 상황에 따른 변수가 모두 검토돼야 하는 만큼 신중을 기해 개발하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급발진 의심 사고는 차종 불문, 브랜드 불문이다. 전기차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강릉 사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조금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한다. 그것이 도현군 가족이 위로받는 길이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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