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전직 국가대표의 허영
전과 10범인 전청조를 재벌 3세라 믿은 남현희는 왜 비난받는 걸까. 모두가 전직 펜싱 국가대표를 손가락질하는데, 막상 따져보면 그 이유가 분명치는 않다. 네티즌 수사대가 주장하듯 전씨와 공범이란 의혹 때문인지(남씨는 부인 중이다), 나이를 마흔둘이나 먹고 성전환 남성의 아이를 뱄다고 믿은 어리석음 때문일지. 자신을 피해자라 주장하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이런 현실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소 19억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사기범을 두고 전 국민이 웃고 떠들며, 그의 ‘I am’ 화법까지 흉내 내는데, 국제 무대에서 수많은 메달을 따낸 자신에겐 한없이 가혹하니 말이다. 전청조는 완전히 가짜지만, 남현희는 피·땀·눈물로 메달을 따낸 진짜 국대 아닌가.
남씨의 화려한 SNS를 비난의 이유로 지목하는 이들도 있다. 커피를 마시는 듯, 소파에 누워 잠을 자는 듯 보이지만, 그가 올린 사진 구석구석엔 명품 가방과 시계, 목걸이가 정교한 아웃포커싱과 맞물린 다양한 구도 속에 놓여 있다. 허영으로 가득한 그의 계정엔 전씨가 선물한 명품이 가득했다. 남씨는 벤틀리 차량을 포함한 명품 40여 종을 경찰에 제출하며 소유권을 포기했다. 너무나 자랑을 많이 한 죄. 남씨가 여기서 벗어나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대한민국의 저출산은 SNS의 허세 때문이란 일타 강사의 주장이 공감을 일으키는 사회에서, 남씨에 대한 비난이 역설적이란 생각도 든다. 사기꾼이 사기 친 돈으로 사준 명품을 자랑한 것은 문제겠으나, 남씨의 허영심 그 자체를 지적하며 고소해 하는 목소리도 상당해서다. 남씨가 공유한 사진과 비슷한 명품 사진은 SNS를 조금만 검색해도 수천, 수만장이 나온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랑인 듯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좋아요’와 팔로워를 늘리며 사는 것이 대한민국의 일상 풍경 아니었나.
‘전청조·남현희 사태’와 같은 사건이 한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넷플릭스는 자신을 수백억 상속녀라 속이고 특급호텔에서 무전 취식하며 미국 사교계를 뒤흔든 애나 소로킨이란 여성의 이야기를 드라마(‘애나 만들기’)로 만들었다. 정체가 드러나 감옥에 갔지만, 소로킨의 고급스러운 취향과 허세 가득한 SNS에 사람들은 그를 진짜라 여기며 열광했고 돈을 빌려줬다. ‘애나 만들기’에서 검사 캐서린은 “오늘날 미국의 문제점이 모조리 담긴 사건”이라며 소로킨을 단죄하려 한다.
경호원을 대동하고 월세 2000만원 레지던스에 살았던 전씨의 사기와 남씨의 허영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러 문제점을 압축한 하나의 현상처럼 느껴진다. 사는 곳과 먹고 타는, 오로지 드러나는 것으로만 끊임없이 계급을 나누는 현실. 종종 가짜가 진짜를 압도하는 속살이 두 사람 덕에 벗겨진 것은 아닐지.
박태인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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