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나의 추하고 아름다운 실패들
그런데 반복하다 보니 실패에도 요령이 붙기 시작했다. 실패가 성공이 되는 마법적 능력이 생긴 건 아니었다. 다만 남의 판단이 끼어들기 전 가장 먼저 내 사건에 자의적 해석을 붙일 수 있었다. 자의적 해석이란 별것 아니고, 실패를 인식한 후 나만의 기준으로 라벨링을 하는 작업이다. 점수를 매기거나 순위를 정하거나, 복구에 드는 비용을 산정하는 등 몇 가지 숫자를 이용하면 쉬웠다. 반복되는 실패들은 점점 일상성을 획득해 갔다.모든 실패가 다른 실패들과 어울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이 돼갔다. 이제 실패가 벌어질 때마다 ‘또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뭔가를 그르쳤구나’ 하고 생각한 후 그냥 살아간다.
요즘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당당하게 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주변인들이 털어놓는 고민이 귀찮아서가 아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실패를 근거로 스스로에게서 자격이나 권리를 박탈하는 습관부터 버릴 필요가 있다. “나 같은 건 밥 먹을 자격도 없어” “난 사람 대접받을 권리가 없어”는 과거의 내가 가장 재미있어하던 자기비하 표현이었다. 저런 말을 뱉으며 안도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모든 걸 내 잘못이라 말하는 순간 저항하고 다투고,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러나 모든 게 불편한 상황에서 마음만 편하다면 그거야말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실패는 죄가 아니다. 불쌍한 인간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러니 실패했다고 해서 불쌍한 인간을 자처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실패를 축복으로 여길 순 없다. 그러나 세상 끝난 듯한 불행으로 인식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이제는 나의 실패들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이터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실패는 무엇이 필요했는가? 무엇을 시도했는가? 그리하여 무엇을 잃었는가? 같은 심도 있는 답변일 뿐이다. 실패에 내포된 정보와 행동 동선을 쫓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다음 액션이 결정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아직 실패하지 않은 또 다른 방식들이 가장 상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실패에 집중하면서부터 성공에 대한 결벽적 갈망도 많이 줄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단숨에 거머쥐는 성공에서 희열을 느꼈는데, 이제는 이런저런 패배감 속에서 마침내 피어오르는 작은 성취감에 큰 가치를 둔다. 실패한 후 곧바로 비슷한 실패를 해도 후회는 없다. 반복되는 실패에서 읽어낼 수 있는 데이터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라는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나 성향, 취향 같은 것들이랄까. 이제는 내 어쩔 수 없는 측면들을 누르기보다 충족시키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안 돼” “하지 마” “참아” 같은 부정적 지시어 대신 “마음대로 하되 책임을 져라”라는 지침을 주는 식이다.
연말을 앞두고 한 해 동안의 크고 작은 실패를 돌아보며 어쨌든 저것들은 온전한 내 것이구나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실패에는 이상한 안정감이 있다.성공하면 누구나 그 성공을 빼앗으려 들지만, 실패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내 것 하나 없는 세상에 유일한 내 것이라면 역시나 실패를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런 우스갯소리를 해본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쓴다.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젊은 ADHD의 슬픔〉으로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오색 찬란 실패담〉, 그리고 첫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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