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버추얼 아이돌이 대세! K팝 산업의 달라진 기류
30대가 되면서 내 주변의 아이돌 팬 대부분은 ‘성덕’이 됐다. 성덕은 보통 ‘성공한 덕후’를 줄인 말이지만 애석하게도 내 친구들을 가리키는 성덕이란 단어는 성공한 덕후가 아닌 ‘성불한 덕후’를 의미한다. 그들은 ‘지난 오빠’가 자신에게 남긴 고통과 번뇌를 끊기 위해 혹독한 무관심을 수련하고 불매라는 무공을 연마했다. 그리하여 성덕들은 K팝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3세대, 4세대 아이돌의 유혹을 이겨내고, 수십 개의 마케팅 특허 기술이 결합해 탄생한 5세대 아이돌의 공세에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역경을 딛고 해탈의 경지로 향하는 수도자와 같았다.
아이돌 가수가 범죄에 연루되는 것도, 그 사건으로 인해 팬으로서 모욕감을 느끼는 것도, K팝이 익숙한 우리 세대에겐 그리 희소한 경험이 아니다. 성덕이 된 내 친구들처럼 ‘탈K팝’을 선언하는 것은 그 모욕감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수도자의 길은 멀고도 험하기에 대부분의 ‘돌덕’들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끝없이 시장을 탐색하며 다른 대상을 향해 환승을 준비한다. ‘버추얼 아이돌’의 등장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 역시 그들이었다. 버추얼 아이돌은 가상의 존재이므로 기존 K팝 아이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사생활에 연관된 구설이나 갑작스러운 신변의 변화가 없었고, 나아가 K팝 산업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돼오던 노동 착취와 인권침해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래서 기존의 K팝 팬들에게 이들은 윤리적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곤 했다.
그러나 모든 K팝 팬이 버추얼 아이돌에게 환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실제로 만질 수도 없는 가상의 존재를 좋아할 수 있어?” 버추얼 아이돌과 K팝이 완전히 다른 장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K/DA’는 〈리그 오브 레전드〉를 비롯한 롤플레잉 게임 문화의 일부였고, 걸 그룹 에스파 세계관의 아바타 ‘아이(ae)’는 SM엔터테인먼트가 만들어온 전통적인 마케팅 기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버추얼 아이돌을 받아들인 쪽은 달랐다.
한 버추얼 아이돌 덕후는 말했다. “너 방탄소년단 실제로 만질 수 있어? 아니잖아. 결국 지금의 휴먼 아이돌들도 다 가상의 존재라니까?” 그는 버추얼 걸 그룹 서바이벌 예능 〈소녀 리버스〉를 예로 들며, 비록 출연자는 모두 아바타 뒤에 있지만 그들의 지향점은 어디까지나 기존 K팝 문화의 질서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이기에 버추얼 아이돌이란 개념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과 같은 기술이 그저 K팝 문화의 일부에 적용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기존 K팝 소비자들 사이에서 버추얼 아이돌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지만, 그사이 ‘버추얼 K팝 아이돌’은 시장에 깊이 들어와 무섭게 세를 확장했다. 지난 8월 인천 송도에서는 국내 인기 아티스트와 버추얼 아티스트가 함께 공연을 펼친, 현실과 가상 세계가 음악을 통해 연결되는 ‘이세계 페스티벌’이 열렸다. 6인조 가상 걸 그룹 ‘이세돌’은 지올 팍, 권은비, 프라우드먼 등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올랐고, 해당 공연은 전국 CGV 상영관에서 동시 생중계됐으며 티켓 역시 모두 매진됐다. 2021년 데뷔한 국내 최초의 11인조 가상 걸 그룹 ‘이터니티’는 2D 애니메이션이 아닌 인간과 가장 흡사한 모습으로 구현돼 리포터, 쇼호스트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해오다가 9월 중순 데뷔 2년 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넷마블과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합작해 만든 4인조 가상 걸 그룹 ‘메이브’는 기성 걸 그룹들의 해외 시장 공략 루트를 충실히 따르며 활동 무대를 국내에서 국외로 넓히고 있다.
이들 중에서도 단연 앞서가고 있는 팀은 5인조 가상 보이 그룹 ‘플레이브’다. 올해 3월 타이틀곡 ‘기다릴게’로 데뷔했을 때만 해도 이들은 큰 주목을 끌진 못했다. 그러나 플레이브는 아이돌 그룹의 전형적인 소통 방식인 화상 팬 사인회, 라이브 방송, 오프라인 콘서트, 자체 제작 예능 콘텐츠 등을 꾸준히 진행하며 팬들을 확보했고, 그 결과 올해 8월 발매한 미니 앨범 〈ASTERUM〉은 첫 주 판매량 20만 장을 기록하며 이들의 성공을 증명했다. 플레이브의 팬덤 ‘플리’는 보컬로이드나 버추얼 페르소나 개념에 친숙한 부류, 플레이브의 외형과 닮은 2D 애니메이션 소비 방식에 익숙한 부류, 기존의 K팝 아이돌 팬덤에 속해 있던 부류가 산발적으로 모여 각자의 노하우를 가지고 플레이브를 다른 이들에게 영업한다. 이는 장르가 불명확해 인기의 구심점이 없었던 버추얼 아이돌의 약점이 도리어 모든 장르의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그들을 통합하는 저력으로 바뀐 사례라 봐도 좋을 것이다.
플레이브의 활동을 보며 또 한 번 놀란 것은 데뷔 초였던 지난 3월과 현재 활동 모습 사이에 상당한 기술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 엔진을 개발하는 회사가 제작한 그룹이기에 이러한 업데이트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특이하다고 느낀 부분은 팬들이 이러한 기술적 향상을 플레이브가 가진 고유의 매력으로 논한다는 점이다. 그래픽 오류로 인해 관절이 기괴하게 꺾이거나 멤버의 신체가 겹쳐지는 식의 버그 사고를 자주 겪어서일까? 최근 팬들은 멤버 은호가 착용한 목걸이가 중력의 방향대로 움직이는 것, 활동 시기가 지남에 따라 멤버 노아의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을 포착해 그것이 마치 그들의 성장인 것처럼 감격을 나눴다. 이는 가상의 존재에게서 얼마든지 현실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긍정적 신호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기술력이 K팝 문화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를 뿌옇게 만들어낼 치명적 스모그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엄습했다.
나는 메타버스가 모든 사람이 인종, 계급, 재산 같은 현실의 가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하며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대안적 공간이 돼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기술은 늘 가장 자본주의적인 문화와 결합한 형태로 내 앞에 등장했다. 버추얼 아이돌은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아이돌 모델링을 거친 아바타들은 대부분 마르고 흰 피부를 지닌 비장애인이다. 이들 대부분은 가상이라는 명목 아래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었던 외형적 다양성을 포기하고, ‘진짜처럼 보이는 것’과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고, 그 결과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유의미한 논의를 모두 역행한 존재처럼 보여지곤 했다. 또한 아바타 뒤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팬 서비스를 하는 실제 가수들, 버그를 잡기 위해 끝없이 서포트하는 노동자의 존재는 버추얼 아이돌이 폐쇄적인 환경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고, 이들이 기존 아이돌 산업에서 강점으로 가지고 있던 윤리적 대안 기능 또한 불확실한 것으로 느껴지게 했다.
나는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그들의 인기 또한 확인했지만 여전히 버추얼 아이돌이 K팝의 대안이나 대체재라 말하는 것에는 슬픔을 느낀다. 한국 문화에서 ‘가상’이란 개념은 해결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덮어씌워 없애는 허술한 주문이었고, 정치적 올바름을 향해 진전시킨 많은 합의를 역행하게 만드는 외침이었기 때문이다. 버추얼 아이돌은 ‘메타버스’라는 기술과 ‘K팝’이라는 문화가 정점을 맞은 시점에 결합한 결과다. 젊고 화려한 이미지를 공유한 이 두 세계는 그 성장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에 발전 가능성 또한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드는 확신은, 버추얼 아이돌이 K팝의 구멍을 보완하고 동행하는 이상적 대체재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진짜 같은 기술’에만 천착하거나 기존의 낡은 질서를 답습하기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이제는 기술이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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