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집이 있었나 없었나'... 사소한 내기가 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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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기자]
지난 여름 십수 년째 이용하는 제2금융권에 들렀을 때의 일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느 때와 달리 장내가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볼일은 뒷전이 됐다. 우선 미간이 일그러질 만큼 신경에 거슬리는 원인을 빨리 찾고 싶었다. 레이더망에 걸린 건 구석에 놓인 고객용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는 남학생 셋이었다. '저것들이! 여기가 지들 놀이턴가?' 꼰대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와 한소리 내뱉으려 목구멍에 장전 중일 때다.
"아들, 확신할 수 있어?"
"엄마, 확실하다니까요."
'아차차! 한 템포만 빨랐어도 큰 낭패를 볼 뻔했네.' 목청 높여 떠들던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맞아 엄마가 일하는 일터에 잠시 들른 아들과 친구들이었다. 그 누구도 내 속내를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내심 머쓱해진 채 대기 순번이 닿아 창구 앞에 앉았다. 그러자 아들과 대화를 나누던 여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시끄러웠노라. 죄송하다며 사과라도 하려나.'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저, 옥룡동(충남 공주 소재 - 편집자 주)에 오래 사셨죠?"
"30년 가까이 살았죠."
"그 동네에 큰 마트 하나 있잖아요? 거기에 'L' 햄버거 가맹점이 있었나요? 아들하고 내기 중이거든요."
"음... 마트에 입점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그쵸? 저는 '없다'에 걸었는데, 18년밖에 안 산 것들이 '있다'라고 자꾸만 우기네요."
▲ 모 마트의 주차장에는 한때 유명 버거 프렌차이즈가 자리 잡고 있었다. |
ⓒ 박진희 |
"여기에 'L' 햄버거 가맹점이 있었던가요?"
마트 여직원은 예상 밖의 질문에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기억을 더듬어 갔다. 간절한 눈빛으로 답변을 기다리는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그녀는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최종 확인까지 해줬다.
"마트에 입점한 건 아니고, 지금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부지에 잠시 있었다고 해요. 이후에는 H 한의원이 있었고요."
"맞다! 그러고 보니 한때 붉은 칠을 한 건물이 있었네요. 바쁘실 텐데... 감사해요."
▲ 시내버스터미널과 우시장이 열리던 인근에 여관 건물이 들어섰으나, 현재는 목욕탕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
ⓒ 박진희 |
올봄,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근 30년 살고 있는 옥룡동의 기록화 작업을 시작했다. 'L' 햄버거 가맹점을 두고 벌어진 소소한 사건은 이후 활동의 분수령이 됐다. 의례적으로 인사만 나누던 동네 분들과 자주 대화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핑계를 방패막이 삼아 설렁설렁 마무리 짓던 일들에 어쭙잖은 근성이나마 보이게 됐다.
1994년에 부천에서 옥룡동으로 이사와 꽃 도매를 하는 사장님은 꽃집이 들어오기 전에 장사 잘되는 옷가게가 자리해 있었다느니, 가게 앞이 2차 도로였다가 4차 도로로 확장됐다느니, 30년 전으로 시간을 되감아 가며 숱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전자제품 대리점 사장님은 시내버스터미널과 소전이 있던 호시절 이야기며, 도로 맞은편에 보이는 낡은 빈집에 얽힌 비화와 주인이 여럿 바뀐 '목욕탕 연대기'를 말씀해 주셨다. 주민자치회 위원장은 1980년대에 '신문물 1번지'였던 옥룡동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롤러스케이트장에서의 추억담을 호기롭게 꺼내기도 했다.
이제는 이렇게 하나둘 모은 주민들의 이야기는 미약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언젠가 더 큰 힘으로 발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열의와 사명감으로 무장한 누군가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더 깊이 있는 정보를 축적하는 데 힘써 주리라. 재능과 센스를 겸비한 다른 이는 신박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기발한 접근법으로 마을사를 널리 알려 주리라 기대한다.
아들과의 내기에서 지긴 했지만, 지금쯤 지난여름 만난 제2금융권의 직원도 남다른 관찰력으로 사라진 공간을 기억한 아들내미를 기특해하며 그의 밝은 미래에 부푼 희망을 품어 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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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옥룡동 마을사 기록작업의 결과물은 올해 안으로 대중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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