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부른 깊은 뜻
[이완우 기자]
▲ 지리산 삼정산 상무주암 |
ⓒ 이완우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지리산 자락에 상무주암(上無住庵)이 있다. 지리산 칠암자 숲길을 거느린 삼정산의 정상을 이루는 세 봉우리에서 지리산 주능선인 벽소령을 바라보는 첫째 봉우리 아래에 상무주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암자는 9세기 중반에 영원 대사가 지리산 영원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원사를 출발하여 1.8km의 너덜 바윗길을 걸어서 빗기재를 넘으면 상무주암에 도착한다. 11월 초순의 가을 산 낙엽들은 바람결에 흔들리며 서늘한 기운에 잡념이 들 새 없이 가볍게 낙하한다. 봄 여름에 걸쳐 이룬 엽록소의 장막을 걷으며 숲은 환해져 간다. 겨울 산의 추위와 침묵을 예감하며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 지리산 상무주암 앞 오솔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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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는 입구에 탐방객의 출입을 사양하는 정낭이 걸쳐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리산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제주도의 풍물인 정낭의 표식을 보니 친밀한 느낌이 든다. 암자 마당 앞 돌담 축대 아래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이 암자는 공양간 안에 바위 틈에서 물이 고이는 샘이 있고, 탐방객을 위해 암자 앞 오솔길에 약수터가 있다.
▲ 지리산 상무주암 다랭이 채마밭 |
ⓒ 이완우 |
매년 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이곳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 열리고 많은 참배객이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주암, 약수암과 실상사에 이르는 14.5km의 숲길을 즐겁게 고행 삼아 걷는다.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할 만하다. 그날에 이곳 상무주암은 참배객들의 점심 공양 장소가 된다. 해마다 이곳에서 수백 명의 점심 공양 한마당이 펼쳐진다고 한다.
상무주암과 경봉 스님 해우소 이야기
암자 앞을 지나가는 돌담 축대 아래 오솔길에서 암자 법당의 상무주(上無住) 편액이 보인다. 이 편액은 20세기 우리나라 불교계 고승인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친필로서 그의 법명인 원광(圓光)을 확인할 수 있다.
▲ 지리산 상무주암 지리산 주능선 조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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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은 사찰의 화장실을 가리켜 해우소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스님이다. 그가 통도사 극락암의 조실이었던 1950년대 어느 날,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와 휴급소(休急所)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대변 공간이 해우소였고, 소변 공간은 휴급소였다.
자기 자신만의 공간인 해우소에서 마음속의 번뇌, 망상, 근심 등을 다 버리라는 경봉 스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스님은 세상 살면서 가장 급한 것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은 별로 바쁠 것 없는 것을 바쁘게 찾으며 산다고 하였다. 그래서 매일 몇 차례 찾는 휴급소는 필요 없이 급한 마음을 쉬어 가라는 뜻이었다. 결국 필요 없는 급한 마음은 멈추고, 진정으로 급한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사찰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세 곳이 삼묵당(三黙堂)인데 승당(僧堂), 욕실(浴室)과 해우소이다. 침묵하라는 것은 신중하게 내면을 성찰하라는 의미이니 삼묵당은 곧 수도의 장소다.
▲ 지리산 상무주암 전망바위 바둑판 문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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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주암에서 고려 시대 스승과 제자인 선승 3명의 이야기
고려시대 보조 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신앙 단체인 수선사를 결성하고 이끌었다. 현재의 조계산 송광사는 처음 이름이 정혜사(定慧社)이며 1205년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社)로 바뀌었고, 고려 말기에 송광사(松廣寺)로 개칭됐다. 수선사는 보조 국사가 결성한 단체이며, 송광사의 이전 사찰 이름이었다.
1197년에 이곳 상무주암에 보조 국사가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보조 국사의 제자인 혜심(慧諶, 1178~1234) 선사가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지었는데, 혜심의 제자인 각운 선사 역시 이곳 상무주암에서 스승의 저술을 자세히 풀이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를 저술했다고 한다. 이들 저술은 고려 시대 선문(禪門)의 필독 서적이었다. 이 저술의 구성은 수많은 선문(선문답)마다 염송(깨달음 경지의 선시)을 달고 다시 상세히 풀이한 설화(주석, 설명)를 덧붙이는 삼단 구성을 되풀이하는 형식이 기본이었다.
각운 선사가 염송 설화를 엮을 때 오랜 저술로 붓끝이 닳아 자주 못 쓰게 되었다. 어느 날 어디선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서 꼬리를 내밀었고, 그 꼬리털로 붓을 만들어 <선문염송설화> 30권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자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 지리산 상무주암 바둑판 문양 바위 |
ⓒ 이완우 |
지리산 상무주암에 전해지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진 세 선사의 수행과 저술 활동으로 보아 이 암자가 고려 불교의 선풍 진작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혼자 선정에 들었는데 허수아비 같았다. 얼굴은 거미줄이 덮었고, 새 발자국이 무릎에 찍혀 있었다. 이곳 상무주암에 거주하며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표현은 수행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구도에 전념했는지를 느끼게 해줘 숙연해진다.
상무주암 옆의 가파르게 서 있는 바위 서슬을 찾았다.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이 뚜렷이 보이는 전망대로 이 암자의 스님이 가끔 찾아와 휴식하고 명상하는 장소로 보인다.
바위에 기대어 자란 듯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리산 주능선이 보여서 색다른 풍경이었다. 이곳 바위 위에 바둑판 문양이 세 곳에 조각나게 그려져 있다. 바둑판은 형식과 규격에 맞지 않아 바둑을 두기 위한 목적은 아닌 듯하다. 푸른 하늘, 지리산 정상, 소나무 등과 어울리는 운치 있는 바둑판 문양을 살펴보면서 전망대 바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 지리산 상무주암 산길 삼정산 조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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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 '지리산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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