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 연주의 피아니스트 손민수 "완주해야 뿌리가 보인다"
베토벤 소나타, 협주곡 등에 이어 계속되는 전곡 연주
"맨몸으로 암벽 등반하는 듯. 그러나 가치있다"
연주했다 하면 전부 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우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을 2017년부터 5년 동안 연주했고 음반으로 남겼다. 장정이 끝난 이듬해에는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12곡)을 모두 연주했다. 이어 베토벤의 협주곡 5곡을 지난 6월 무대에서 연주하고 녹음했다.
손민수(47)는 완주하는 피아니스트다. 떨어뜨려 한 곡씩 연주해도 대곡인 작품들을 세트로 연주한다. 이번에는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Etudes-Tableaux) 전곡이다. 이달 독주회에서 이 작품을 모두 친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911년과 1917년에 각각 한 세트씩 연습곡을 내놨다. 첫 번째 세트(작품번호 33번)는 8곡, 두 번째(39번)는 9곡이다. 개별 작품은 피아니스트들과 청중의 사랑을 받는 곡이 많지만, 총 17곡을 모두 연주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손민수의 앞선 전곡 연주에 비춰봤을 때도 과감한 완주 도전이다. 그는 왜 전곡을 고집할까. 이번 전곡 연주는 어떤 의미인가.
지난달 30일 만난 손민수는 “하나의 큰 뿌리가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곡가가 써 내려 간 순서대로 한 장르를 훑었을 때 근본적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품번호 33의 연습곡 8곡을 보면요, 마지막 순간 즉 죽음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예요. 8번 ‘진노의 날(디에스 이레)’을 위해서 죽음에 대한 기도, 죽은 자들을 위한 위로가 이어지는 거죠.”
두 번째 세트(39번)에도 비극과 죽음에 관한 스토리가 이어진다. “7번째 곡에서 완전한 장송 행진곡이 됩니다.” 그는 39-7의 마지막 부분에서 러시아의 종들이 요동치는 장면에 주목해보라고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여러 작품에서 종소리를 사용했지만, 이 작품의 종소리는 유독 불안하고 산발적으로 울려댄다. “아무리 들어도 어떤 조성의 화성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어요. 완전한 파국인거죠.” 장송 행진곡 이후에는 새로운 세계다. “장송 행진곡 이후의 8번은 신비하고 환상적인 세계에요. 비극과 죽음까지 경험하고 나서, 외롭고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세계가 갑자기 펼쳐지는 거죠.” 손민수는 이런 드라마틱한 구성을 전곡 연주가 아니고서 어떻게 표현하겠느냐고 반문한다.
회화적 연습곡의 전곡 연주가 유독 드문 이유는 뭘까. 손민수는 “듣는 사람에게 큰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음악이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우회적인 답변을 내놨다. “작곡가의 아주 개인적인 고백이에요. 그런데 그 내면이 아주 암울하고 고독해 어떨 때는 고통스럽죠. 반복해 들어야 내면이 명확히 이해되는 음악이고요.” 그는 또 “피아니스트들이 17곡 전곡을 자주 연주하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피아니스트에게는 분명 의미가 있는 전곡 연주다. 무엇보다 다시 나오기 힘든 피아니스트였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색채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손민수는 “어려서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녹음한 이 작품을 듣는 순간부터 전곡 연주를 꿈꿨다”고 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어요. CD가 닳도록 밤새 들었죠. 피아니스트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어떤 색과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지 놀라웠기 때문이죠.” 그는 작곡가가 직접 녹음한 음반을 “간결하고 깊게 집중해서 한 순간을 향해 달려가는 에너지가 압도적”이라고 소개했다.
전곡에 여러 차례 등정한 그는 이 일을 암벽 등반에 비유했다. “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보호 장비 없이 암벽을 오르는 사람이었어요. 안전함을 다 내려놓고 자연과 일대일로 만나는 순간에서 의미를 찾는 거죠.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어려운 순간을 계속 뚫고 나간다는 점에서 피아니스트의 일과 비슷합니다.” 발췌 연주가 일종의 완충 방법이라면, 그는 보호 장비를 내려놓고 전곡을 모두 연주하고야 마는 등반가에 가깝다.
더 연주하고픈 전곡 시리즈는 당연히도 많다. 우선 바흐의 평균율. 바흐가 건반악기의 건반 하나하나에 대해 붙인 24곡씩 두 세트를 완주하면 공연 시간만 4시간이다. 그다음은 슈만의 모든 작품. 손민수는 “후기 낭만 음악에서 가장 중요했던 작곡가인 슈만의 삶을 완전히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체력이 허락해야 하므로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지 않으려고 한다”던 그는 “그래도 쇼스타코비치의 프렐류드와 푸가 전곡(24곡)은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음악 많은 부분이 아이러니죠. 스탈린 정권 시절에 많은 것을 숨겨야 했고요. 그런데 프렐류드와 푸가에는 정말 자신의 마음이 진실하게 들어있다고 느껴요.”
손민수의 완주하는 기질은 그의 제자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에게도 흐른다. 임윤찬도 2021년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연주한 데 이어 내년 쇼팽의 연습곡 전곡 연주와 녹음을 준비하고 있다. 보통 알려진 전곡인 24곡에 유작인 3곡까지 연주하는 완전한 전곡 연주다.
손민수는 전곡 연주에 대해 이렇게 종합했다.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의 99%는 좌절과 고통의 순간이에요. 그런데 도전이 안 되고 쉽게 된다는 걸 느끼면 그게 또 불안하죠. 그래서 더 큰 산을 찾아 계속 가는 거예요.” 회화적 연습곡 전곡 연주는 23일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 28일 롯데콘서트홀, 다음 달 2일 대구 콘서트하우스, 3일 광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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