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한 번뿐인 인생, 밀도 있는 삶을 살려면…
남들 따라 사는 삶 비웃어
바깥의 정보 좇아가는 대신
자기 존재의 의미 살피고
의미 있는 것으로 인생 채워야
11월은 결산과 계획의 달이다. 불확실성이 높아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시대 흐름을 읽고, 사회 방향을 더듬으며, 라이프스타일 변화를 내다보면서 새해의 일을 마련한다. 때에 맞춰 서점가엔 ‘트렌드 코리아 2024’ ‘2024 트렌드 노트’ 같은 예측서들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국내외에서 일어난 사회 문화적 현상을 바탕 삼아 내년을 전망하는 책들이다. 관련 서적들을 한꺼번에 모아 읽다 보니 흥미로운 단어와 마주쳤다. ‘밀도 있는 삶’이라는 말이었다.
밀도는 단위 부피당 질량을 뜻하는 말이다. 주어진 시공간에 더 많은 사물을 밀어 넣거나 더 많은 일이 일어나면 그 밀도는 높아진다.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룩하고 더 많은 일을 경험할 때 밀도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려면 평균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쉬고, 똑같이 여행하고, 똑같이 놀아선 밀도를 높일 수 없어서다. 자신이 바라는 일에 스스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때 삶의 밀도는 높아진다.
‘2024 트렌드 노트’에서는 밀도 있는 삶을 "더 자유롭고 더 주체적인 삶, 다양한 시도와 경험으로 만드는 더욱 풍요로운 삶에 대한 갈망"으로 정의하고, ‘트렌드 코리아 2024’에선 "스스로 주체가 돼 일상 흐름을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 타인이 정해준 삶의 흐름이 아닌 자신이 적극적으로 자기 시간을 지키고 관리해야 하는 사회의 도래"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는 시간과 경험의 개인화 현상을 촉발한다. 인간 전체가 평생 비슷하게 살아가는 집단 대중 사회에서 이탈해서 ‘서로 다른 스케줄로 일하고, 먹고, 생활하려는 개인’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트렌드코리아 2024’에 따르면, 밀도 있는 삶에 관한 관심을 촉발한 원인은 네 가지다. 첫째, 소유 경제에서 경험 경제로의 이행. 예전엔 비싼 소유물을 자랑했다면, 이제는 여행지, 맛집, 핫플레이스 등의 경험을 과시하는 시대다. 좋은 경험엔 시간이 필요하므로, 사람들은 과거보다 시간의 밀도를 높이는 데 관심을 쏟게 됐다.
둘째, 정보 기술의 등장. 교통 상황, 맛집 순위 등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기술은 우리의 시간 사용 습관을 과거보다 정밀하고, 주도적으로 바꾼다. 이제 사람들은 정거장에 나가 막연히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타야 할 버스가 오는 시간을 정확히 파악한 후, 그 직전까지 자유롭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인생을 더 촘촘히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즐길 만한 콘텐츠의 폭발적인 증가. 쏟아지는 뉴스들, 유튜브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구독형 콘텐츠 서비스에서 보내오는 볼거리들은 우리 인생 시간을 끝없이 잡아먹는다. 2배속, 3배속의 삶을 살지 않으면 인기 콘텐츠 흐름을 좇기도 힘들어졌다.
넷째,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가져온 업무 형태 변화. 유연근무, 재택근무 등이 사회 전체에서 실험되면서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개인마다 다른 형태로 시간을 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로써 집단적, 획일적 시간 사용은 약해지고, 시간을 자기에 맞게 디자인할 수 있는 탈대중화 현상이 흔해졌다.
그러나 단순히 일상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더 압축적으로 보낸다고 해서 삶의 밀도가 높아졌다고 할 순 없다. 더 많이 경험하고, 즐기고, 일하는 것으로 삶이 충만해지진 않는다. 좋은 삶은 속도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와 방향의 문제다. 너무나 많은 것을, 더 빨리 즐기려 할수록 삶은 공허해진다.
느긋함을 잃고 쫓기는 삶에 뿌듯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남들 바라는 걸 바라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삶을 한마디로 비웃었다. "무리의 겉보기만 좇다가 허울이 유일한 가치가 돼 버린 인생!"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삶은 아무리 바빠도 소용없다. 밀도 높은 삶을 추구한다면, 유행에 끌리고 쏠리고 들끓는 대신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삶의 기술 사전(문학동네)’에서 안드레아스 브레너 스위스 바젤대 교수와 외르크 치르파스 독일 베를린대 교수는 밀도 높은 삶에는 너그러운 여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흔히 조바심 내고 안달하면서 남의 눈치를 보고 바쁘게 그 뒤를 따르는 데 골몰한다. "빨리 가서 서둘러서 먹어 치우고, 동시에 여러 일을 벌이는 걸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조급한 사람은 더 많이 일하고 더 자주 소비할 순 있으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진 못한다. 사랑, 우정, 신뢰, 정의 같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바삐 움직이는 대신 하나에 시간과 정성을 쌓아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들여 얻은 것이 없는 삶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울 뿐이다. 천천히, 느긋하게 존재의 의미를 새기고 음미하며 다듬어 가는 사람만이 삶의 밀도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되어감의 존재(하이데거)’다. 이 세상에 던져질 때는 아무도 삶을 선택할 수 없으나, 태어난 자신을 어떤 존재로 가꿀 것이냐는 자기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의지와 열정을 품고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바꾸어 가는 실천 속에서 우리 삶은 비로소 충만해진다. 인생의 본질은 "자기 존재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달려 있다." 삶의 밀도란 시간 가성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실현이다.
바란다고 누구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의 나를 되짚으면서 나의 모자람을 돌아볼 마음이 있고, 되고 싶은 존재를 향한 의지가 있고,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되기 위해 해야 할 당위를 지킬 때, 비로소 우리 존재는 완성된다. 따라서 꾸준히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성찰의 시간,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차분히 돌아볼 여유, 삶의 방향과 목적에 시간과 노력을 온전히 집중하는 실천 없이 삶의 밀도는 불가능하다.
밀도 높은 삶을 바란다면 바깥의 정보를 좇아 아등바등하거나 타인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대신에 항상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깊게 살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자기 본모습에 충실하게 사용할 때,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소중한 가치에 맞게 살아갈 때, 우리 삶은 충만해진다. 작은 단위로 시간을 끊어가며 아끼는 것으로는 삶의 밀도를 높일 수 없다. 인생은 더 많은 것으로 채우기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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