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노동자의 세계, 지하철이 달리 보인다

김성호 2023. 11. 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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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78]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 <언더그라운드>

[김성호 기자]

대학생 시절 백화점 뒤편에서 일한 적이 있다. 주로 영업시간이 끝나고 셔터를 내린 뒤부터 일이 시작됐다. 들어오는 물건을 백화점 판매 층으로 옮겨놓고, 이따금씩은 점포의 마네킹을 분해하고 조립했다.

이전까지 백화점은 물건을 사는 곳이었다. 나는 언제나 손님으로 내 모습을 가정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기껏해야 판매노동자가 생각이 미치는 전부였다.

그러나 일을 하고 난 뒤 백화점은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손님 눈에 비치는 공간만큼 비치지 않는 공간 또한 많은, 그곳의 낮을 위해 쉴 틈 없는 밤을 보내는 이들로 가득한 노동의 공간이 됐다.
 
▲ 언더그라운드 포스터
ⓒ 부천노동영화제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노동의 공간

굳이 십 수 년도 더 된 옛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영화 한 편 때문이다.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가 소개한 작품 <언더그라운드>가 바로 그 영화다. 영화는 사람들의 시야에 닿지 않는 노동의 세계를 비춘다. 부산 시민들의 다리가 되어주는 지하철, 그 지하철을 이용하는 이들조차 볼 일 없는 이들의 세계다. 제목 그대로 땅 밑의 이야기, 그곳에서 노동하는 이들에 대한 영화다. 97분의 다큐멘터리로 지하철을 달리게 하는 지하노동자의 세계를 다룬다.

영화의 시작은 한 고등학교의 일상이다. 부산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아이들이 졸업앨범에 들어갈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투닥이고 농담하는 평범한 일상들, 영화를 보는 누구나 겪어왔을 유쾌하고 즐거운 시절이다. 그러나 마냥 웃고 떠들 수만은 없다. 공고를 나와 취업현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때가 시시각각 닥쳐온다. 특히 기계과 아이들은 취업하는 업체에 따라 향후 전망이며 처우가 천차만별이다. 이들 중 몇은 지하철을 다루는 일터로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이내 지하철 노동자들의 모습을 비춘다. 부산공고 졸업생 중 여럿도 몸담고 있을 지하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지하철을 뜯고 닦고 기름칠하고 조이는 데 여념이 없다. 누구는 바퀴를 전담하고, 누구는 지붕을 맡는다. 선로를 담당하는 이들은 선로를 따라 걸으며 들고 있는 망치로 퉁퉁 두드린 뒤 고정되지 않은 부분을 단단히 조인다. 종일 운행했을 지하철 곳곳이 문제가 없도록 정비하는 게 이들의 일이다. 아무 문제없이 내달리는 지하철 뒤엔 이처럼 노동자들의 땀이 묻어 있는 것이다.

지하철이 내달리기까지 묻어 있는 땀방울이 있다
 
▲ 언더그라운드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불행히도 땀만 묻지는 않는다. 어떤 노동자는 피를 보기도 한다. 인터뷰에 응한 젊은 노동자 하나는 제가 겪은 일을 털어놓는다. 무거운 장비에 손가락이 눌려 하마터면 손가락을 잃을 뻔했다는 그다. 다행히 절단은 면했다는 그는 회사로부터 산재 처리를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산재 대신 부서비용으로 치료비를 충당했다며 영화를 찍는 이에게 도리어 질문을 해온다.

"정말로 산재처리를 하면 회사 이미지가 나빠지나요?"

처음엔 안 보이는 곳에서 시민을 위해 수고로운 일을 하는 이들을 담아내는 듯하던 영화가 조금씩 본색을 드러낸다. 영화가 담아내는 노동자의 면면은 알고 보니 죄다 비정규직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부산교통공사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분란을 겪어왔다. 오랜 노사갈등과 인원 축소 흐름 속에서 공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거 채용했던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만 원 내외의 돈을 받고 험한 현장에서 일한다. 정규직 노동자와 섞이지 못하고 때로는 밥그릇을 빼앗는다는 비난까지 받아가며 묵묵히 제 일을 한다. 상대적으로 처우가 나은 정규직 노동자를 바라보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약칭 민주노총의 지원을 받아 노조를 결성하기도 한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 적어도 무기계약직 전환을 목표로 투쟁에 임한다.

왜 그들의 노동은 대우받지 못하나
 
▲ 언더그라운드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영화에 등장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면면이 제법 인상적이다. 정비노동자는 물론이고 청소노동자와 매표직원, 기관사 등 여러 분과 노동자들이 얼굴을 비춘다. 이들은 하나 같이 제 밥그릇의 위기에 봉착한 상태다. 혼자서는 결혼생활을 꾸리기 어려운 박봉으로, 오랫동안 일하기 어려운 환경인 건 기본이다. 평생 직장이라 생각하고 다니는 이들조차 여러 분과가 자동화며 인원감축 정책에 직면한 상태다. 승객이 적은 어느 역사는 아예 무인화가 이뤄져 에스컬레이터조차 운행하지 않는다. 매표소도 모두 자동화돼 자판기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람들이 자동화 흐름에 관심 갖지 않는 사이, 어느덧 바람은 기관사에까지 미쳐 있다. 사람 없이도 원격 조종되는 기차에 탄 기관사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자동화는 한편으론 위험을 허락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손을 빌려야만 이뤄지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나사를 풀고 닦고 기름칠하고 조이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정비노동자를 월 2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에 고용해 반장만 평생직장일 뿐 다른 이들은 한철 아르바이트로 뜨고 나기 일쑤다. 전문성은 갈수록 낮아지고 제 일에 자긍심을 갖기도 어려운 형편이 되고 만다. 반장은 카메라 앞에서 갈수록 노후화되는 설비 탓에 미래를 위해서라도 기량을 갖춘 정비사를 길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책상 머리맡에 앉아 숫자만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은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고,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정책을 노동유연화라고 말한다. 현장 노동자들은 이것이 비전문화라고 말한다. 시민의 안전을 생각하며 제 업에 자긍심을 갖는 이도, 그리하여 오래 자리를 지키며 기술과 경험을 연마하는 이도 사라져만 간다.

한 편의 영화 뒤로 달라지는 시선
 
▲ 언더그라운드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전작 <그림자들의 섬>에서 조선소 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루었던 김정근 감독이다. 전작에서도 엿보였던 장단이 이번 영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초점이 명확해보였던 전반부에 비해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중심이 흐트러지는 한계가 명확하다. 말이 많지 않은 구성이 담박하긴 할지라도 관객들로 하여금 극에 몰입하기 어렵게끔 한다. 고교생과 비정규직 문제, 지하철노동자와 노조 결성 이야기가 서로 긴밀히 묶이지 못한다. 사측이나 정부의 입장을 들으려 나아가지도, 노동자의 속 깊은 이야기로 들어서지도 못해 어딘지 어중간한 인상이다. 전반적으로 용두사미란 인상이 강하다.

그럼에도 <언더그라운드>는 의미 깊은 작품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미처 대하지 못한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사회가 돌아가는데 필수적인 업무를 하는 이들이 스스로가 열심히 살지 않아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시험을 치지 않고 현장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한다며 자조하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내보인다. 시민 중 아무나 쉽게 대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전문적이다. 이들이 없다면 도시의 필수기능이 막힌다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처우는 참담하기만 한가.

노동이 제 가치를 얻지 못하는 세상이다. 분업화된 노동은 사회의 주인이어야 마땅한 시민이 그 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한다. 파편화된 각 직역의 처우가 갈수록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시민의 안녕과 안전을 위하여 지켜야만 하는 곳이 있음을 이 영화가 알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지하철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될 것이다. 내게 백화점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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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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