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측하고 징그러운 메두사, 이 조각은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 <편집자말>
[이유리 기자]
사회생활을 지역신문사 기자로 시작했다.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 신입 기자 중 여성은 딱 나 하나뿐이었다. 요즘에야 그렇진 않겠지만, 당시만 해도 신문사 공채를 할 때 여기자는 기수당 한 명만 뽑았다. 나는 일명 '토크니즘(Tokenism)'의 도구로 쓰인 셈이었다. 토크니즘은 조직이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회적 소수집단의 일부만을 토큰(token)으로 뽑아 구색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나는 심각한 남초집단 속, 눈에 띄는 여기자로 덩그러니 던져졌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주눅이 들었다. '그래,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두고 보자'라는 시선이 언제 어디에서나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여 내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면, '역시나 여기자는 안돼'라는 말을 들을까 봐 부담스러웠다. 나는 개인으로서 평가받는 게 아니라, 어쭙잖게 여성을 대표하는 자리에 나도 모르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남성의 방식을 배우려고 애썼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해, 못 마시는 술을 센척하며 넙죽넙죽 받아 마시기도 했다. 남성들 사이에서 오가는 질펀한 농담 속에서도 속으로는 경멸할지언정,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예민하게 반응하면 그들 리그에 끼워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발달하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힘들었다. 이 극기의 상황 속에서 스트레스는 당연하게도 무럭무럭 자라났는데, 희한하게 그 스트레스는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다른 여성들이 나만큼 노력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화가 났던 것이다. 그들이 체력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환멸이 솟구쳤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여성 일반에서 분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성의 시각으로 다른 여성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소위 '명예 남성'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명예 남성, 아테나
명예 남성이란 무엇인가? 위키백과에 따르면 남성 중심 사회를 기능하게 하는 가치와 관습을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그에 따르는 여자이다. 즉 여성이면서도 남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가 명예 남성이다.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 이야기'에도 명예 남성이 등장한다. 바로 전쟁의 여신 아테나이다. 아테나는 남성의 편을 들며 메두사를 저주했고, 메두사가 남성의 손에 처단될 수 있도록 갖은 도움을 준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메두사는 머리카락 가닥가닥이 모두 혀를 날름거리는 뱀으로 이뤄진 괴물이다. 이뿐만 아니라 빛나는 눈을 가져 누구나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로 굳어 버리게 만드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두사는 사실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던 인간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메두사의 금빛 머리칼은 뱀으로 변하게 됐을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통치자(포세이돈)가 메두사를 신전에서 범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우스의 따님께서 외면하시고는 아이기스(방패)로 정숙한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행동이 벌을 받지 않고 지나가면 안 되기에 여신께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끔찍한 뱀 무더기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우스의 따님은 아테나 여신을 일컫는다. 아테나 여신은 '불미스러운 일'로 자신의 신전이 더럽혀진 것에 분노해 메두사의 머리칼을 뱀으로 만드는 벌을 내린 것이다.
아테나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 학자 아폴로도로스가 쓴 <비블리오테케>에 따르면 페르세우스를 도와 그가 메두사를 처단하는 것을 도와준 이가 바로 아테나였다.
아테나는 페르세우스의 손을 잡아 그를 인도하고 청동방패를 선물하며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보면서 치명적인 눈길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안전하게 그녀의 머리를 벨 수 있었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메두사> 1617~1618년,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
ⓒ 페테르 파울 루벤스 |
메두사 최후의 모습은 이렇게 섬뜩하고 기괴할 뿐이다. 이유가 있다. 메두사는 마땅히 죽어야 할 괴물이며 남성 영웅의 자랑스러운 전리품으로 인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괴물이 아닌 '인간 메두사'
▲ 해리엇 호스머, <메두사> 1854년, 대리석, 미국 미니애폴리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
ⓒ 해리엇 호스머 |
호스머가 활동하던 당시 그녀의 고향이었던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성폭행을 법으로 고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요구하는 성관계를 거부할 법적 권리가 전혀 없었고, 수없이 많은 백인 남자들이 흑인 여자들을 강간하고도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 호스머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괴물이 아닌 무고한 여성 메두사를 표현함으로써, 호스머는 이 같은 폭력적인 남성 문화에 항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호스머가 뱀의 모습 역시 끔찍하고 징그럽게 묘사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호스머는 애완동물로 뱀을 키워본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애완 뱀의 이름을 재밌게도 '이브'라고 지어주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여성과 뱀에게 뒤집어씌운 남성 문화에 대한 반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실제 <메두사> 속 뱀을 표현할 때도 호스머는 숲에서 뱀을 직접 잡아 와서 작업했는데, 뱀을 죽이기 싫어 클로로포름으로 마취시킨 다음 3시간 반 동안 석고 안에 넣어 거푸집을 만든 후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다른 무엇보다 호스머가 평범한 여성의 모습으로 메두사를 등장시킨 이유는 이것이다. 해리엇 호스머 스스로가 다름 아닌 메두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성애는 비정상이며, 죄악이라고 여겼던 19세기를 살았던 레즈비언이었다.
▲ 해리엇 호스머, <메두사> 1854년, 대리석, 미국 미니애폴리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
ⓒ 해리엇 호스머 |
그렇다면 다시 아테나를 보자. '사람 메두사'를 조각해나가면서 호스머는 궁금했을 것이다. 왜 아테나는 성폭행 가해자 포세이돈이 아니라 희생자인 메두사를 벌했을까. 왜 일명 '명예남성'이 되었던 걸까.
기원전 5세기에 아이스킬로스가 쓴 비극 <에우메니데스> 속 아테나의 대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니라. 나는 결혼 외에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아테나가 고백하듯, 그녀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인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신으로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면서 성장했다. 남성 신이 권력의 대부분을 잡고 돌아가는 올림포스에서, 아테나는 남성의 가치를 대변했고 그에 따라 주요한 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포세이돈과 메두사의 일을 마주했을 때 내뱉은 아테나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메두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만 아니었어도 신이 품은 탐욕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테나는 당연한 수순인 듯 포세이돈 대신 메두사를 벌함으로써 가부장제와 공모하고, 뒤이어 페르세우스를 도와 메두사를 기어이 죽인다. 아테나는 그렇게 자신이 다른 여신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명예남성이 갖는 한계
'나는 메두사가, 괴물이 아니야.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나는 기센 여자가 아니야.' 21세기가 되었지만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아테나가 많다. 아테나가 살았던 올림포스가 그랬듯, 명예 남성이 되어야 사회에서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는 권력 구조가 여전히 굳건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도 '작은 아테나'였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며 스스로 '대세'를 따랐다. 자, 그렇다면 열심히 명예 남성으로 살았던 내 기자 생활은 어떻게 됐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답하자면 내 첫 번째 사회생활은 무참하게도 실패했다. 기를 쓰며 버티던 중, 허탈하게도 엄마가 지나가듯이 한 말에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적당히 져주면서 원하는 걸 얻는 게 현명한 거야. 너무 애쓰지 마."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엄마의 조언은 나의 퇴사 결심을 굳히게 했다. 명예 남성이 빠지는 함정을 명백하게 짚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명예 남성은 다른 여성들에 비해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또렷한 한계가 있었다.
잘나되, 남성들을 위협할만큼 잘나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할 것. 그렇게 '적당히 져주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 명예 남성의 지위는 남성에게서 위임된 것이기에, 수틀리는 순간 남성 권력이 언제든 걷어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나는 가슴 위에 얹어진 가짜 훈장을 진저리치며 떼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아테나일 수도 메두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 페르세우스는 될 수 없었다. '아테나 분장을 한 채 페르세우스의 칼을 들고 자기 자신의 목을 치는 메두사'. 이것이 '명예 남성'의 본 모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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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구본형 지음, 생각정원, 2013 <진리의 발견>,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다른, 2020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브리짓 퀸 지음,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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