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김선재 2023. 11. 5. 10:4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사람들② 김초원, 이해봉, 이지혜, 김응현, 최혜정

[김선재 기자]

 공주대학교 세월호 순직 교사 추모공원
ⓒ 임재근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사람들①] "죽더라도 학생들 살리고..." 세월호 순직교사 5명의 이야기(https://omn.kr/263xv)에서 이어집니다.

학생들에게 선물 받은 귀걸이... 마지막이 되다

김초원 선생님은 순직공무원 묘역 16호에 잠들어 있습니다. 2학년 3반 담임이었으며 화학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까? 내가 가르치는 과학을 통해 아이들이 신비한 자연현상을 이해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멋진 하늘빛을 감상할 줄 알고 풀, 나무, 꽃과 같은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면!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소리의 원리도 깨달으면 좋겠고. 일상생활에서는 무엇보다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좋은 물건들을 보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면. 이런 걸 한마디로 표현하면? 마음이 열려 있는, 아니 그것보다는 마음이 따뜻한 교사?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줄이자면 맵시 있는 선생님!'

김초원 선생님이 처음 출근하기 전날 일기에 쓴 내용입니다.

2014년 4월 15일 김초원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세월호에 탑승했습니다. 이지혜, 전수영, 유니나, 최혜정 선생님과 함께 5층 침대방을 배정받았고요. 16일로 넘어가는 자정, 누군가 다급하게 선실 문을 두드립니다. 김초원 선생님이 반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지민이였습니다. "선생님, 수진이가 아파요. 열 많이 나요." 김초원 선생님은 부랴부랴 4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이 쉬고 있는 선실 문을 열었습니다.
   
 교사 김초원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6호)
ⓒ 임재근
  
그곳에 3반 학생들이 깨어서 모두 모여있었습니다. 이윽고 케이크에 촛불이 켜지고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1988년 4월 16일. 그날은 김초원 선생님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귀걸이와 반지를 선물로 준비해서, 선생님에게 직접 끼워드렸고요. 김초원 선생님은 선물로 받은 귀걸이와 반지를 그대로 착용하고 잠들었습니다.

날이 밝고 배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구명조끼 없이 뛰어가던 아이에게 김초원 선생님은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학생들이 있는 4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이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선생님은 선물 받은 귀걸이를 그대로 끼고 있었습니다.

김초원 선생님은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참사 발생 3년이나 지난 2017년 7월에서야 순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졸업한 공주대학교의 동문들은 2021년 10월 30일 학교 교정에 추모 공원과 기림비를 조성하여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픈 학생까지 챙겼던 바다의 킹왕짱
 
 교사 이해봉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7호)
ⓒ 임재근
 
2학년 5반 이해봉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치던 분이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이해봉 선생님은 학기 초 첫 수업 시간에 자신을 '바다의 킹왕짱'이라고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해봉, 바다 해(海) 봉새 봉(鳳)입니다. 봉새는 상상 속의 새로 아주 상서로운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왕들이 입는 옷이나 앉는 의자에 새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다의 왕자'라고 풀이하는데, 여러분이 잘 쓰는 말로 하면 '바다의 킹왕짱'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었습니다.

이해봉 선생님은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종종 학생들과 농구를 했습니다. 스타크래프트나 모바일 게임도 아이들과 함께하며 어울리곤 했고요. 수업 시간 외에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친근감을 쌓아가는 과정이 교육의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축제가 있을 때는 다른 교사들에게 춤을 가르쳐 주며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수업에 소홀하지도 않았습니다. 근현대사를 주로 가르쳤는데요. 입시만이 교육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늘 올바른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역사는 점수를 잘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왜 역사를 배워야 하고,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4월 12일 이해봉 선생님은 아내와 함께 서울대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5반 박진수 학생이 입원해 있었습니다. 뇌종양 수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는데요. 선생님은 진수가 못내 마음에 쓰였습니다. 선생님은 진수에게 "함께 못 가 미안하다"는 말과 "꼭 완쾌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바다의 킹왕짱 이해봉 선생님은 순직공무원 묘역 17호에 안장되셨습니다.

쪽지 한 장까지 소중히 간직한 선생님
 
 교사 이지혜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8호)
ⓒ 임재근
 
김초원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순직을 인정받지 못했던 선생님이 한 분 더 있습니다. 기간제교사였던 이지혜 선생님입니다. 2학년 7반 담임이었고 국어를 가르치던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순직공무원묘역 18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지혜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님은 지금도 딸이 남긴 편지를 하나씩 꺼내어 읽으신다고 합니다.

"1996년 7월 28일 생일날. 엄마! 저 지혜예요. 이 무더운 여름날 가게에 앉아서 장사하시는 것 참 힘드시죠? 제가 이 다음에 잘해 드릴게요. 절 이렇게 낳아 주시고 예쁘게 키워 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나쁜 길로도 빠지지 않을게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절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저에게 행복을 한 아름 안겨주셔서요."

이지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도 손 편지를 자주 쓰곤 했습니다. 야자 감독을 끝내고 오후 11시에 귀가하는 날에도 어김없었습니다. 몸 약한 딸이 늦은 시간까지 무리하는 모습을 어머님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선생님은 어머님이 잠드신 이후에 몰래 문을 닫고 학생들에게 줄 편지를 쓸 정도였습니다. 학생으로부터 받은 답장도 가득했습니다. 선생님 방에는 학생에게 받은 편지가 가득한 상자가 6개나 있었습니다. 학생이 건넨 간단한 쪽지도 선생님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습니다.

상담실에서 학생과 함께 컵라면을 끓여 먹고, 학생 생일이 되면 늘 생일 축하 문자를 보내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따로 불러 다른 학생 몰래 더 챙겨주는 분이었습니다. 야자 시간에 잠든 아이를 깨울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고, 학생을 야단친 후에는 '내가 심했나?'며 후회하는 다정다감한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흰 국화 대신 놓인 카네이션
 
 교사 김응현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19호)
ⓒ 임재근
 
2학년 8반 김응현 선생님 별명은 '아빠'였습니다. 선생님은 어려운 가정형편을 이겨내고 충북대 사범대를 졸업했습니다. 1996년 12월 수원 매향여고에서 교사 면접을 봤을 때 일입니다. 면접 시험에서 "우리 학교에 들어오려면 소정의 기부금을 내라"는 말에 김응현 선생님은 "나와 안 맞는 것 같다. 다른 사람 알아보라"고 답을 했습니다. 떨어진 줄 알았던 면접에서 "다음 주에 출근하라"는 통보를 듣게 되는데요. 사실 학교가 선생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을 격의없이 대했으나 자신에게는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교사에게는 수업이 가장 중요하다. 자신이 맡은 교과는 완벽하게 소화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으셨는데요. 자신이 하는 수업 준비는 무엇보다 철저했습니다. 교사 생활하는 동안 정리한 수업자료를 차곡차곡 모아 수업에 활용했고, 새로운 수업 연구와 실험도 끝없이 탐구했습니다.

선생님은 과학다운 과학을 가르치는 게 꿈이었습니다. 교직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계속 단련한 그는 수질환경기사 자격증, 영재 2급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요. 영재교육 연수를 300시간 이상 이수했습니다. 과학에 재능 있는 학생을 가르치고 싶었던 선생님은 17년간 정들었던 매향여고를 떠나 단원고로 부임했습니다. 평생 여학생만 가르쳤던 선생님은 남학생 반을 맡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학생들 사진을 집으로 가져와 하나씩 오려 교무수첩에 붙였습니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5월 14일 세월호 4층 선수 좌현에서 선생님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옷 안에 있던 신분증으로 그를 찾았습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조문객이 몰려들었습니다. 흰 국화 대신에 카네이션이 영정사진 앞에 놓였는데요.

어떤 제자는 대성통곡을 하며 쓰러지고 혼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문객이 너무 많아 음식 100인분은 10분도 안 되어 동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수백 명 제자가 선생님을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김응현 선생님을 '우리를 존중해 주신 분'으로 기억했습니다. 장례 이후 순직공무원 묘역 19호에 안장되셨습니다.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
  
 교사 최혜정의 묘 (순직공무원묘역 20호)
ⓒ 임재근
 
최혜정 선생님은 동국대 사범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2년 차 새내기 선생님이었습니다. 신규 교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척척 잘 해냈고요. 활기차고 긍정적이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월이면 내내 아이들과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가족과 다툰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주민인 아이, 가정에 불화가 있는 아이,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 일지에는 사연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최혜정 선생님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고 싶어했습니다. 선생님은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고, 학생들을 웃게 했습니다. 시험 기간이 되면 반 학생들에게 컴퓨터 사인펜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요. 토끼 모양 스티커에 한 명 한 명 이름이 쓰여 붙어있었습니다. 학생 생일이 되면 한 명씩 불러 선물을 챙겨주었습니다.

학생들이 떠들어도 결코 화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단호하고 조용하게 "조용히 해!"라고 짧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를 듬뿍 받았습니다. 늘 선생님과 함께하고 싶어 했습니다. 학교 다니는 일이 행복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 생일날에 색종이와 풍선으로 교실을 꾸몄고요. 한 명씩 일렬로 서서 츄파춥스를 선물했습니다. 그렇게 1년을 함께한 아이들과 2학년으로 함께 올라간 최혜정 선생님은 수학여행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9반 담임이던 선생님은 참사 직후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학생들은 먼저 내보내고는 4층 배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단체대화방에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남긴 메시지가 유언이 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순직교사 묘역 전경
ⓒ 임재근
 
세월호 참사 당시 긴박한 생사 갈림길에서 선생님들은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들은 평소 학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교사,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는 자상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평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음씨 따뜻한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많은 부분 드러났습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세월호는 과적이 일상이었습니다. 승객과 화물을 얼마만큼 실었는지 기록과 관리도 엉망이었습니다. 선원들에게는 비상시 대피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해경을 비롯한 구조 세력과 지휘 세력은 무능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고 마음씨 좋은 개개인에게 빚을 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더 이상 대형 참사를 막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월호 참사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순직 공무원 묘역에 안장된 열 분 선생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