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스트레스 사망? 완벽주의 탓"한 공단… 法 "업무상 재해"
낯선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던 중 사망한 수의사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개인의 완벽주의 성향이 원인”이라며 유족급여 지급을 거부했지만,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개인적 취약성만으로 업무 스트레스와 자살 사이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박정대)는 지난 9월 14일 전직 유한양행 직원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3일 밝혔다.
30대 수의사, 과장 승진 1년 만에 사망
30대 수의사였던 A씨는 2016년 유한양행에 입사해 축산‧수산‧양봉 등 업무를 맡았고, 2020년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애완동물용 사료 제품 개발 등 새로운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디자인‧마케팅과 같은 생소한 업무에 적응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고, 기능성 사료 신제품 출시 준비 과정에서 포장지에 오메가3 함량이 잘못 적히는 사고도 생겼다.
이후 10월 말부터 A씨는 가족들에게 ‘자존감이 자꾸 떨어진다’ ‘요즘 왜 이렇게 우울하지?’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자꾸 놓치는 부분이 많다’는 말을 했고, 잠을 2~3시간밖에 자지 못해 정신과 진료를 본 뒤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하기도 했다. 12월 21일엔 ‘팀장이 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것 같다. 표정을 보면 안다. (나는) 일 관련해서 전문 분야가 없다’고 말했고, 12월 22일 회의에서 유산균 관련 질문에 대답하려다 팀장으로부터 제지당한 뒤엔 ‘내가 잘 모를 것 같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상황이 힘들었다’ ‘성과를 못 내서 인사고과가 낮아졌고, 더는 이 회사에선 승진할 수 없을 것’이란 말도 했다. 결국 A씨는 다음 날인 23일 아침 사망한 채 발견됐다.
근로복지공단 “개인적 완벽주의 성향 탓” 유족급여 지급 안 해
유족은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로 정신적 인식능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자해, 사망에 이르렀으니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그러나 2021년 10월 13일 ‘회사 업무로 인한 압박보다는 개인적인 완벽주의 성향과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현실로 인해 극단선택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부지급 결정을 받았고, 이에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망인의 우울증이 발병‧악화했고, 그로 인해 정상적인 인식‧정신적 억제력이 저하돼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단할 수 있다”며 A씨의 업무와 사망 사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회사 차원의 직접적 압박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개인적 취약성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면서도 “그것만으로 스트레스와 우울증, 자살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법원 “업무상 스트레스 인정, 우울 악화시켜”
재판부는 또 A씨가 ‘오메가3 포장지 오기’ 사건 이후 “회사 내부 평가 저하와 승진 기회 상실 등을 우려하며 심각한 좌절감‧무력감, 수면장애 등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며 “정신과 진료기록 상 수면장애는 약으로 나아지고 있었지만, 우울 증세는 악화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A씨가 유서에 ‘부족함, 바보 같음’ 등 자책하는 내용을 적은 것도 전적으로 회사 업무와 관련한 것이고, 업무와 관계없는 개인적 요인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업무상 스트레스‧피로 등이 우울증 악화의 원인일 수 있으나 단일 요인은 아니다’는 감정의의 평가 소견을 두고도 “그 자체로 A씨의 업무상 스트레스가 하나의 원인임을 인정한 것”이라고 봤다. 평소 가족‧대인관계가 원만하고 과도한 채무 등 경제적 사정도 없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외에 A씨의 사망을 설명할 수 있는 동기가 보이지 않는 이상 완벽주의적 성향이나 소극적 기질 등에 스트레스가 더해지며 우울증을 악화시켰다고 봄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한편 근로복지공단은 해당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2심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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