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제2인격 고립의 공간’으로 만든 칼 융 [유경희의 ‘그림으로 보는 유혹의 기술’]
남자들의 로망은 집을 지어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 남자들은 집을 짓지 않고 집을 싣고 다닌다. 정주가 아닌 탈주? 캠핑을 떠나는 것이다. 거기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커피를 내리고, 불멍과 물멍을 한다. 대부분 홀로가 아닌 가족과 함께거나 캠핑장에서 지인들과 합류한다. 가끔은 이것이 진정한 휴식(pause)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단순한 휴식보다 영혼을 돌보는 더 근원적인 휴식이 절박한 건 아닐까?
S. 프로이트와 더불어 정신분석학의 대가였던 칼 구스타브 융(1875~1961년)은 중년에 자기 홀로 있기 위한 집을 손수 지었다. 평상시에는 정신과 의사 겸 교수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로 살다 주말이면 다른 인격으로 살기 위해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만큼은 오롯이 건축가이자 목수이자 조각가이자 화가로 살았다. 칼 융은 어떤 연유로 자기만의 집을 짓게 됐을까? 융이 제일 처음 집을 지은 것은 1923년,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해였다. 취리히 호숫가에 있는 볼링겐 마을이었는데, 본가가 있는 퀴스나흐트로부터 32㎞ 정도 떨어져 있었다. 융은 어릴 적부터 물가에 살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물은 ‘무의식’으로 가는 통로를 상징한다. 처음에 지었던 집은 몽골 게르(ger) 같은 원시적인 형태였다. 시기적으로 볼링겐의 첫 번째 집은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지어졌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육친의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의 상징으로써의 자궁과 같은 공간을 지은 것으로, 융이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실제 볼링겐의 집은 어머니의 품속 같은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융은 이 집에서 깊은 휴식과 더불어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4년 후인 1927년 성탑과 같이 생긴 중앙부가 덧붙여졌다. 다음 4년 후인 1931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융은 부속 건물을 확장해 혼자서만 있을 수 있는 방, 즉 영적인 단련을 위한 성소를 마련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935년, 하늘과 자연을 향한 넓은 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호숫가에 뜰과 회랑을 추가했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1955년 아내가 죽고 몇 달이 지난 후 마지막 건물(2층)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 융은 80세의 고령이었으니, 주변인들은 죽을 나이에 집을 짓는다고 수근거렸다.
융의 볼링겐 성탑은 1923년부터 1956년까지 33년 동안 4개의 건축물로 완성됐다. 4를 완전한 숫자로 여겼던 그의 소망이 그대로 이뤄진 것. 이런 증축은 융이 정신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것과 일치해 일어났기에, 이 성탑은 융의 내면, 즉 자아의 완성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융은 이 집에서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 볼링겐의 집은 어떤 전기시설이나 급수시설도 없었다. 아마 일부러 불편함을 생활화하고자 편의시설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등불을 켜고, 물을 긷고, 장작을 패고, 요리를 하는 등 육체 노동을 하거나 호수를 바라보면서 며칠씩 보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신의 제1인격인 교수이자 의사인 그의 페르소나(사회적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로서 먼저 단순한 노동을 시작한 셈이다. 융이 그런 일을 할 때만큼 편안해 보인 적이 없었노라고 제자가 귀띔할 정도였다. 이처럼 그는 볼링겐에서 집 짓기, 수로 만들기, 그림 그리기, 조각 만들기 등 오롯이 손과 몸을 사용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볼링겐에서 융은 제2인격으로서의 삶에 충실했다. 그에게 제2인격은 노인, 현자, 조각가 등 무의식에 존재하는 필레몬(모든 이들이 알아보지 못한 신을 알아본 신화 속 인물로 융의 잠자는 내면을 일깨워준 중요한 존재)과 같은 존재다. 이처럼 융은 제2인격으로 입문하기 위해 단순한 노동을 시작했고, 제2인격의 세계와 완전히 조화가 이뤄졌을 때 가장 기발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제2인격이 바라는 대로 글을 썼고, 대부분의 창조적인 작업은 이곳에서 이뤄졌다. 이로써 볼링겐 성탑은 융의 제2인격을 위한 집이 됐다.
전적으로 홀로 있는 공간 원해
볼링겐에서 철저하게 제2인격으로 살기 위해 융은 때로 잔인해져야만 했다. 그는 손님을 함부로 들이지 않았다. 융의 제자들이 퀴스나흐트에 있을 때, 볼링겐에 들러도 되냐고 물으면 즉각 모질게 거절했다. 이처럼 그는 낯선 분위기를 몰고 오는 ‘불쑥 들르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융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제2인격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만큼은 철저히 제2인격으로 사는 데 어떤 방해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 이로써 볼링겐은 융이 전적으로 홀로 있는 공간이 됐고, 그가 일하는 동안에는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조차 잠깐이라도 들를 수 없는 곳이 됐다. 성탑을 한 땀 한 땀 돌로 쌓아 올린 것처럼 융은 특별히 돌과의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돌 건축을 하고, 돌 조각을 했다. 융은 유년 시절부터 돌이 품고 있는 기묘한 오라를 체험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바위에 앉아 있고는 했는데, 그때 돌이 나인지 내가 돌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경계 체험을 하면서, 시간을 초월한 무시간성의 엑스터시를 느꼈던 것! 이렇게 돌과의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그는 진심으로 석공들을 존경했고, 그가 돌 하나를 이해하고 다룬 방식은 숙련된 석공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항시 ‘현자의 돌’로 비유되는 연금술적인 사유를 품었던 융은 자신의 마음과 영혼과 인식을 돌에 새겨야 했음을 고백하고는 했다. 즉 그의 돌 작업은 그것이 성탑이든 비석이든 조각이든 모두 신앙 고백과 같은 것이라고! 아마 그는 돌이 품고 있는? ‘무시간성’으로 돌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자기’인 죽은 자들과의 연결을 느끼며 마음의 평온을 찾은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융에게 돌로 된 성탑의 완성은 자아의 완성이자 자기의 실현이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사는가? 아니 어디에 살고 싶은가? 이제 캐슬, 팰리스, 서밋을 잊고 향기 나는 작고 소박한 집을 하나 짓는 게 어떨까? 그리고 그 집에 스스로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이름 하나를 붙이는 건 어떨까. 그리하여 살고 싶은 집이 아닌, 그만 죽기에 딱 좋은 집, 영혼이 머무르는 여한 없이 아름다운 성소 한 채 마련해보는 게!
“볼링겐에서 나는 가장 깊은 곳까지 나 자신이었다.” -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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