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타그램] 흔들린 사진도 쓸 데가 있다.

허영한 2023. 11. 4. 16:5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들은 빨리, 그리고 선명한 흔적을 남겨서 원래의 모습을 쉽게 바꾼다. 크거나 어두운 것들은 흔들려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빛의 관점에서 어두운 것들은 남겨진 흔적 자체가 없었다. 흔들리는 중에도 멈추는 순간들이 있어서 흐려지는 것들은 흐려지고 남는 것들은 남는다. 우연이 자연의 법칙과 함께하는 일이고 우연도 어느 정도 필연이 필요하다. 시각적 개연성을 위한 약간의 필연. 우선 거기에 있는 것과 그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적이건 무위에 떠밀려 흘러온 결과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들에서 이야기는 나타난다. 흐릿한 시야와 흔들리는 손도 하나의 시점이다.

밤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악보를 그렸다. (서울, 2018)

모든 것들이 원만할 때는 목적 없는 사진을 찍게 되지 않는다. 의미 없어 보이는 표현에 대한 방어의 벽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견고해서 너무 많이 보게 되고, 숨어 있는 것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기진하고 취한 상태에 역설적으로 카메라를 꺼낼 기운으로 가장한 만용이 생긴다. 찍히거나 말거나 찍는지 마는지 알기도 어렵고 알고 싶지 않은 상태. 존재와 세계에 대한 인식도 집착도 별로 남지 않은 상태. 보이는 것들 사이에 나는 없고 그들끼리의 관계만 있는 상태. 아무도 달려오지 않고 묻지 않는 무위로 가득한 시간. 사실과 비사실의 경계 또한 무의미한 부유의 시간이다.

서울, 2018

의식하지 않은 흔들림. 실체와 허상의 경계가 없어지고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에 대한 의식도 없어지는 순간. 무의식으로 바라본 눈앞의 시간들. 사진은 존재했던 사실과 더불어 존재했던 형식과 모양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규칙이란 사람의 사고라는 지평선을 기준선으로 잡았을 뿐인데, 흔들림은 존재했던 형식에 위반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크고 어두운 것들과 작고 밝은 것들의 관계는 사진 한 장 안에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의 일들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교보문고 빌딩 벽에는 꽃이 피었다. (서울, 2018)

보이지 않거나 통념과 다르게 보이는 것들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대로 혹은 보고 싶은 대로 쉽게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보고 싶은 대로 보인다는 말이 맞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고 말할 때는 상태가 일반적이지 않은 특이한 예외의 경우를 전제한다. 눈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이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남은 것들만 명료해진 순간들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고 할 수 있겠다. 본다는 것은 시각이 아니라 의식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과 의식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서울, 2018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 의미는 ‘시간’이라고 썼다. 존재의 물성보다는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상태 즉, '거기-있음(Dasein)'을 본질적 개념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의 눈은 주어진 것만을 보는 눈이 아니다. 그 눈은 이미 해석하는 눈이다. 뒤에서 해석을 조작하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그 시각이 바로 존재의 시각이다’고 했다.

서울, 2019

흔들린 사진에서는 많은 것들이 달려오고 달려가고 스쳐 가거나 떠다닌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 속에는 단 하나 가만히 있는 것이 없다. 하늘에서는 노래가 비처럼 내리고, 흔들린 벽면에는 꽃이 춤춘다. 흔들리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세상 모든 것들이 시간 위에 떠 있음을 말한다. 아니면 세상 모든 것들이 떠받치고 있는 유일한 것이 시간일 수도 있다.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변하는 것들 가운데서 무존재로 있음으로써 그 존재 사실을 드러낸다. 사실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또한 그것들을 허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이 허상인 가운데 사진만이 사실을 이야기하거나 그 반대이거나 하다. 보이는 대로 흔들리는 대로 그려지는 비현실적이고 기계적이고 사진적인 사실이다.

'사진은 인용이다'(존 버거). 서울, 2018

손은 흔들려서 사진에 그림을 남겼다. 손이 흔들린 것은 그림의 반대 모양이었다. 사진에는 이런 것들로 가득하다.
꽃의 반대, 달려오는 사람들의 반대, 흔들림의 반대, 길의 반대, 당신의 반대, 세상의 반대 그리고 나의 반대들이...

편집자주 - 사진과 보이는 것들, 지나간 시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씁니다. ‘언스타그램’은 즉각적(insta~)이지 않은(un~) 사진적(gram) 이야기를 뜻하는 조어입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