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발자취 따라 걸은 여행,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정명조 기자]
세조는 피부병을 심하게 앓았다. 40대 후반부터는 거동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신미대사를 만나려고 보은에도 들렀다.
세조실록 32권(세조 10년 2월 27일)에 '거가가 보은현 동평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車駕經報恩縣東平, 夕次于屛風松, 僧信眉來謁, 獻餠百五十盆, 分賜扈從軍士)'라고 실려 있다. 그때에도 속리산 들어가는 길목에 명품 소나무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이품송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가을이 무르익은 시월 말, 국립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곳을 중심으로 세조의 발자취를 따라 말티재와 정이품송을 찾았다. 법주사에서 복천암까지 이어지는 세조길도 걸었다.
말로 넘었다고 해서 말티재
말티재는 속리산 길목 해발 430m에 있다. 꼭대기에 이르는 1.3km 구간은 꼬불거리는 열두 굽이 고개다. 세조가 신미대사를 만나려고 속리산에 갈 때 가마 대신 말로 갈아타고 넘었다고 해서 말티재다.
▲ 말티재 꼬불꼬불 열두 굽이나 되는 가파른 고개다. |
ⓒ 정명조 |
말티재꼬부랑길을 걸었다. 말티재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한 바퀴 도는 8.6km 길이다. 높이가 거의 변하지 않아 밋밋하다. 산 중턱을 깎아 만들어서 전망은 별로다. 사람들과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하기는 좋다. 모노레일 승강장에서 시작한 집라인 8개 코스가 꼬부랑길을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며 지나간다.
꼬부랑길을 만들며 깎아버린 목탁봉 터에 목탁이 있다. 100년 된 살구나무로 만들었다. 세 번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얀 종이에 소원을 적고 목탁을 쳤다. 이슬을 머금었는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마지막으로 걷고, 카페에 들렀다. 따뜻한 대추차를 마시며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말티재자연휴양림에 짐을 풀었다. '자연 체험과 학습을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소개하고 있다. 속리산국립공원 끝자락에 자리 잡았다. 말티재전망대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벼슬을 받은 소나무
▲ 정이품송 한쪽 가지가 부러졌지만, 품위는 그대로다. 오른쪽 가지 밑에 돌멩이로 표시한 부분이 속리산 옛길이다. 세조가 지나간 길이다. |
ⓒ 정명조 |
▲ 정부인송 정이품송에서 직선거리로 4.2km 떨어진 곳에 정부인송이 있다. |
ⓒ 정명조 |
정이품송은 외롭고 아프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다. 병충해로 잎이 누렇게 마른 적도 있고, 비바람에 가지들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품위는 그대로다. 가운데 가지가 올곧게 뻗어 꼿꼿한 기상을 잃지 않았다. 정부인송은 심심하지 않고 건강하다. 주변에 나무들이 많다. 서로 바람막이가 되어준다. 밑동에서 갈라진 두 줄기에서 잔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어 넉넉하다. 모나지 않고 너그러운 모습이다.
산림청은 2002년부터 정이품송 후계목을 길러내고 있다. 정이품송 수꽃 가루를 정부인송 암꽃에 인공수분 시켜 씨앗을 받았다고 한다. 정이품송공원에도 말티지방정원에도 후계목이 자라고 있으나, 정이품송이 지닌 기상과 품위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목욕하고 병이 나은 곳... 세조길을 걷다
▲ 태평저수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로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왼쪽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그 밑에 있는 은폭동에서 시작된 물이 흘러 저수지에 머무르다 달천을 따라 돌고 돌아 남한강에 이른다. |
ⓒ 정명조 |
▲ 수정봉 거북바위가 있는 봉우리다. 당 태종이 거북의 목을 자르고 등에 탑을 쌓았다. 훗날 사람들이 탑을 없애고 목을 다시 이어 붙였다. |
ⓒ 정명조 |
▲ 목욕소 세조가 이곳에서 목욕하고 병이 나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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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천암 세조가 신미대사를 찾아와 법회를 열었다. 오른쪽 바위에 ‘복천(福泉)’이라고 쓰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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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탑 숨겨진 명당자리에 신미대사와 그의 제자 학조대사의 승탑이 있다. |
ⓒ 정명조 |
바위에서 나오는 약수를 한 바가지 마시고, 암자 마당을 나와 왼쪽으로 난 계단을 올랐다. 5분 정도 산길을 걸어가면 신미대사와 학조대사의 승탑이 있다. 암자와 떨어져 있지만 숨겨진 명당자리다. 산줄기가 내려오다 만들어진 판판한 곳에 승탑이 있고, 그 너머는 깎아지른 벼랑이다.
▲ 추래암 수정봉에서 굴러떨어진 바위라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수정암에서 법주사 가는 길목에 여럿이 있다. |
ⓒ 정명조 |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미(信眉)'를 검색하면 모두 136건이 나온다.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에서 그를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세종이 내린 법호에서도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뜻)'라는 말은 신하들이 반대하여 끝내 쓰지 못했다. 그러나 유교의 나라에서 궁궐 안에 내불당을 짓고, 신미대사를 그곳에 머무르게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행적이 더욱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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