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대가, 믿음의 효과를 처절하게 보여주다

안지훈 2023. 11. 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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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10주년-100만 관객 두 마리 토끼 잡은 대작 <레베카>

[안지훈 기자]

 
▲ 뮤지컬 <레베카> 포스터 <레베카>는 10주년 기념 공연에서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류정한, 민영기, 옥주현, 신영숙, 김보경 등 탄탄한 라인업으로 무장한 <레베카>는 11월 19일까지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공연된다.
ⓒ EMK뮤지컬컴퍼니
 
스산한 배경을 뒤로 하고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 나의 레베카" 하며 노래하는 장면은 극장을 찾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뮤지컬 <레베카>가 그동안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아왔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10주년 기념 공연으로 돌아와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밀리언셀러 뮤지컬'의 반열에 오른 <레베카>.

<레베카>는 10주년에 걸맞은 캐스팅을 준비했다. 2014년 초연을 포함 꾸준히 작품에 참여하며 흥행을 이끈 류정한, 신영숙, 옥주현을 비롯하여 걸출한 배우들이 캐스팅보드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들을 제외하고 민영기, 에녹, 테이가 '막심' 역에 이름을 올렸고, 장은아와 리사가 이 '댄버스 부인' 역에, 김보경과 이지혜, 이지수 등이 '나(I)' 역에 캐스팅됐다. 레드벨벳 웬디도 '나'에 분하며 뮤지컬 무대에 데뷔했다. 호화로운 출연진을 자랑하는 <레베카>는 오는 19일까지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공연된다.

믿음의 대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 소설, 이를 원작으로 한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미스터리 스릴러. 어딘가 스산하고, 어딘가 음침하고, 때로는 히스테릭한 <레베카>를 관통하는 뭔가를 찾기 위해 애썼다.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그 동기를 하나씩 파헤쳐 보니, 사이사이에 '믿음'이 있었다.

'막심'의 아내였던 '레베카'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그래서 극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기에 '레베카'는 완벽한 안주인이었고, '막심'이 소유한 맨덜리 저택의 집사인 '댄버스 부인'은 그런 '레베카'를 존경했다. 아니, 존경보다 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 어쩌면 숭배. 그래서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가 죽지 않았다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레베카, 지금 어디 있든 멈출 수 없는 심장 소리 들려와
(···) 레베카, 나의 레베카, 어서 돌아와 여기 맨덜리로" (넘버 '레베카 ACT2')

특정 인물에 향한 과신은 그 외의 인물들을 배제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댄버스 부인'도 그랬다. '막심'이 새 아내로 '나'를 데리고 왔지만, '댄버스 부인'은 '나'를 새 안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안주인은 '레베카'뿐이었기 때문에.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멸시했고, 갖은 계략으로 '나'를 조롱한다.

이런 '댄버스 부인'에게 큰 변화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레베카'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부터다. 자신이 '레베카'를 소중한 존재로 생각한 만큼 '레베카' 역시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여겼다고, 자신과 '레베카'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비밀따위 없었다고 믿었지만, 특정 사건을 계기로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자신의 전부였던 '레베카'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자, 그의 세상도 무너져내렸다. '레베카'를 그리워하며 불렀던 넘버 '레베카 ACT2'가 리프라이즈(Reprise)되고, 여기서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가 죽었음을 시인한다.

"레베카, 날 배신한 이름
이제는 멈춰버린 심장 소리야 이 모든 것들 의미없어
레베카, 나의 레베카, 이제 사라져 영광의 맨덜리"

믿음이 강했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레베카'가 맨덜리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인정한 '댄버스 부인'은 맨덜리 저택에 불을 지른다(넘버 '불타는 맨덜리'). 이어지는 장면에서 '댄버스 부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삶도, 그의 세상도 모두 무너져내렸다. 다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믿음에는 대가가 따른다.

믿음의 효과

편견, 확증 편향 등은 모두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믿음이 필요하다. 다만 믿음이 선한 의도를 지녀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타인을 배제하는 믿음이 아니라, 포용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레베카>는 믿음의 대가도 보여주지만, 믿음의 효과도 동시에 보여준다.

맨덜리 저택의 새 안주인이 된 '나'는 주변의 시선에 괴로워한다. 하녀 출신인 자신이 '막심'과 어울리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레베카' 이야기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책한다. '나'에겐 믿음도, 믿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나'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막심'의 누나인 '베아트리체'와 그의 남편 '가일스'가 '나'를 환하게 대해준다(넘버 '가족이란 낯선 이름'). '막심'의 친구 '프랭크'는 '레베카'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진실한 '나'가 훨씬 좋다고 말이다(넘버 '별빛 같은 한 사람'). 또 '베아트리체'는 '나'에게 '막심'을 부탁한다며 믿음을 실어준다(넘버 '여자들만의 힘').

조금씩 힘을 얻은 '나'는 '막심'의 처절한 고백을 듣게 된다. '막심'은 '레베카'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고백을, 그리고 '레베카'가 당한 불의의 사고의 비밀을 듣게 된다. 맨덜리 저택의 사연을 알게 된 '나'는 이제 자신이 안주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자신이 안주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나'는 '레베카'의 물건들을 내다버리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고, '댄버스 부인'이 보는 앞에서 '레베카'가 소중히 여겼던 큐피트상을 깨뜨린다(넘버 '미세스 드 윈터는 나야'). 이후 '나'는 '댄버스 부인'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막심'에게 닥친 위기에서 기지를 발휘하며 '막심'을 돕는다. 믿음이 믿음을 낳고, 그렇게 점점 강인해진다.

그 결과, '댄버스 부인'의 삶이 무너져내렸음에도 '나'와 '막심'의 삶은 더 단단해졌다. 맨덜리 저택은 사라졌지만, '나'와 '막심'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로에게 믿음을 준 사람들, '막심'과 '나'의 사랑을 응원한 사람들이 희망을 노래하고, '나'와 '막심'이 행복한 키스를 나누는 것을 끝으로 <레베카>는 막을 내린다(넘버 '에필로그 - 어젯밤 꿈속 맨덜리').

"서로를 믿는 사람들에게 두려울 일은 없어
벼랑 끝에도 다리를 놓지 환한 빛의 다리를
거센 불길을 헤치고 절망 끝에 온 희망
어젯밤 꿈속 맨덜리 자유를 꿈꾼 사랑"

<레베카>는 맨덜리 저택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상반된 결과로 귀결된 서로 다른 믿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상호 신뢰를 통한 공동체 재건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일상에서도 타인에 대한 신뢰와 의무가 감소하며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고, 불신과 혐오로 사회가 분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점점 서로를 믿기 어려워지는 사회에서 퍼트넘의 문제의식을 떠올리며 <레베카>가 전하는 믿음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공동체 속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우리 함께 성찰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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