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사망 뒤 시부 모신 12년, 이제 며느리는 독립한다
[김성호 기자]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10여 년 전 독일 철학계를 강타한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의 첫 문장이다. 저술의 뚜렷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첫 문장만큼은 문학적으로나 마케팅적으로나 강렬한 효과를 발휘했다 해도 좋겠다. 그건 이 문장이 말하는 바에 시대가 공명했다는 뜻이다. 언제나 명확한 시대의 특징이, 때로는 질병이라 부를 만큼 명확한 한계가, 동시에 어떤 미덕 또한 존재한다.
▲ 웰컴 투 X-월드 포스터 |
ⓒ 부천노동영화제 |
21세기에 새로 쓴 <삼대>를 보라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가 선보인 <웰컴 투 X-월드>엔 삼대가 등장한다. 81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은 이 집의 손녀딸 한태의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녀의 엄마 최미경이다. 십여 년 전 남편을 사고로 잃은 뒤 집안을 책임져 온 며느리다. 감독의 오빠이기도 한 아들은 멀리 호주로 떠나 있는 상태로, 집엔 이들 모녀와 다른 한 명이 함께 살고 있다. 다름 아닌 감독의 할아버지가 되겠다.
특이한 점이라면 할아버지가 외조부가 아닌 친조부란 점이다. 말인즉슨 주인공 최미경은 남편이 떠난 뒤 시아버지를 모시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시아버지에게 다른 자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맏며느리기도 하거니와 본래 가족에 충실한 성향을 가진 미경이 자연스레 시부모를 모셔온 세월이 벌써 십 수 년이 되었다.
미경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몇 년 전 갈라선 상태다. 늘 미경의 지지가 되어주었던 시어머니가 집을 따로 구해 나간 뒤로 미경은 집에서 시아버지를 챙기고 이따금 시어머니를 들여다보며 며느리의 역할을 다해 왔다. 이 모습이 딸 태의의 눈에는 여간 이상한 게 아니다. 남편이 없는 이상 시부와 며느리의 관계도 멀어질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시부의 유별난 성격과 그로부터 거듭 상처받는 며느리의 사이를 생각해보자면 집을 나와 따로 사는 것이 서로에게도 나을 것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 웰컴 투 X-월드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시부를 모시는 며느리
영화의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미경의 집은 시월드, 정확히는 옛(Ex) 시월드다. 시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는 하지만 가족들과 부딪치는 것은 시아버지이므로 집 안의 분위기가 편해진 것도 아니다. 시아버지 나름대로 손아래 가족들을 신경 쓰는 부분도 없지 않겠으나, 몇 년 전 직장에서 겪은 일로 화가 가슴에 맺힌 그다. 시시 때때로 올라오는 화를 편히 생각하는 며느리에게 퍼붓는 날도 없지 않으니, 집안 분위기가 이따금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냉랭하기도 하다.
영화는 어느 순간 반전의 계기를 마주한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이제는 분가를 하라고 통보한 것이다. 태의가 볼 때는 이게 무슨 기회인가 싶지만 미경은 전혀 아닌 모양이다. 나가라는 말을 듣고도 집을 나갈 기색이 없는 그녀를 보며 태의는 미경이 대체 무슨 생각인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처음은 그저 돈이 없어서인가 하고 의심한다. 아무래도 딸과 함께 살 집을 구하려면 목돈이 들 테고, 여느 자식이 그렇듯 부모의 정확한 재정상태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떠밀리다시피 부동산을 도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실제가 제 생각과는 다름을 이내 알아차리게 된다. 엄마는 넉넉지는 않아도 집을 구할 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엄마는 이제는 X가 된 시월드를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 웰컴 투 X-월드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엄마를 이해하기까지의 여정
영화는 차츰 미경의 심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미경은 어째서 X-월드를 떠나지 못하는가. 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대신 옛 동네를 맴돌려고 하는가. 그것이 딸 태의의 관심이 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엄마라는 세계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탐구하는 딸의 연구일지가 된다. 그리고 그 연구는 나름의 성과에 닿는다.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딸의 말이 있다. 다름아닌 딸이 결혼을 않고 살겠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흔하디 흔해진 비혼주의라지만, 엄마에겐 그 말 만큼은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경에게 결혼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미경의 언니이기도 한 태의의 이모는 카메라 앞에서 그녀가 어릴 적 보고 자란 것들 영향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다름 아닌 미경의 외할머니, 그녀의 가정에 충실하고 행복했던 삶이 미경의 꿈을 이루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미경의 외할머니는 손이 없는 제사라도 사흘 남았을 때부터 미리 준비하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그런 마음씨로 남편과 집안 자식들을 챙겼다고 했다.
마침 따뜻하고 정 많은 성품으로 태어난 미경은 그런 외할머니의 모습에 큰 영향을 받았고 스스로 맏며느리로 살겠다 다짐하게 되었으리라고 그녀의 언니가 이야기한다. 실상 미경의 삶을 살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뚜렷한 결심의 날이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충실하게 어른을 모시고 자식을 돌보는 착한 며느리이자 인자한 어머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삶은 그런 그녀에게 역경을 가져와서 남편은 일찍이 사업에 실패하고 밖으로 나돌다 죽고 말았고, 저와 성향이 맞지 않는 시부와 함께 십 수 년을 살아오게 된 것이다.
▲ 웰컴 투 X-월드 스틸컷 |
ⓒ 부천노동영화제 |
그녀들의 삶을 응원하며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 몇이 있다. 유독 남의 결혼식에 다니길 즐겨하는 엄마는 어느 날 아주 먼 친척의 결혼식을 찾는다. 아버지의 고모의 자식의 자식이라나, 암튼 스스로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그 먼 친척의 결혼식을 찾아 나선 길을 딸 태의가 동행한다. 직계가족 중 누구도 찾지 않는 먼 청첩에 응한 엄마가 혹여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다. 예식장에서 신부의 이름을 보고는 제가 생각한 이의 결혼이 아니구나 당혹하는 미경의 모습이 딱 태의가 걱정했던 그림이 펼쳐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후는 정반대다. 그곳에서 만난 나이든 할머니는 미경을 반갑게 맞이한다. 그녀뿐만 아니다. 한참 손아래 친척을 기억하며 매만지는 손길들이 미경을, 그를 지켜보는 딸 태의에게 특별한 감상을 일으킨다. 어쩌면 이것이 엄마가 그리워하는, 지난 시대의 삶의 방식이며 정을 나누는 모습이었겠구나 하고 영화를 보는 이조차 생각하게 된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시부를 모시고 따로 나간 시모를 챙기며 제 고통을 감추고 자식을 길러내는, 누구는 멍청하고 답답하다 여길 그런 삶을 사는 여성이 어쩌면 대우받고 존중받는 시대도 있었으리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가족 중 어느 누구를 비난하지 않는다. 조금 유별나고 남을 괴롭게 하는 삶을 산 할아버지를 지목하긴 하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삶이 있음을 보인다. 태의의 눈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미경의 모습 또한 마침내는 이해시킨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 둔하고 성실하기만 한 그 모습이 대신 정감 있고 착하게 비추어진다. 할아버지와 엄마와 자식의 삼대 사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세대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이 다큐의 미덕이라 할 것이다.
초점이 명확하다거나 대단한 깨달음이 있는 영화라 보기는 어렵겠다. 다만 제 엄마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댄 딸의 시도가 제 부모를 충실히 알지 못하는 다른 집 많은 자식들에게 나름의 울림을 줄 수 있으리라 여긴다.
또한 부천노동영화제가 이 영화를 택한 지점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얼핏 영화 안엔 노동이 들어설 구석이 없어 보이는데, 가만히 지켜보다보면 이 모두가 결국은 노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다. 시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일 또한 노동이며, 딸을 키우는 어머니의 일 역시 노동이다. 그런 노동에 더하여 그녀는 일터에서 일을 하고 돈을 모아서 독립에 이르게 된다. 영화 중간중간 드러나는 중대한 위기라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세비와 집값의 문제인데 오늘의 노동이 처한 문제가 이와 얼마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부천노동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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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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