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집권 넘어 세습 정치… 거꾸로 가는 민주화 시계, 왜?

김지애 2023. 11. 4. 04:0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동남아 국가들 ‘권력 대물림’ 가속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통치자의 장기 집권 이후 2세가 권력을 물려받는 ‘세습 정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동남아시아 족벌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 지역의 정치·문화적 특성에 기인하지만, 중국의 역내 영향력이 한층 커져 동남아 국가들의 정치적 민주화가 지체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지율이 80%에 달하는 조코 위도도(62) 대통령이 아들을 차기 부통령 후보로 올리며 ‘정치 왕조’ 구축에 나섰다. 그린드라당 총재인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내년 대선 도전을 선언하면서 조코위 대통령의 장남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36) 수라카르타 시장을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는 퇴임을 앞둔 조코위 대통령 지지층의 표를 흡수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조코위 대통령은 3연임을 금지하는 헌법 때문에 차기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2021년 수라카르타 시장 출마를 계기로 정계에 입문한 기브란 시장이 단번에 부통령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이해충돌 논란도 불거졌다. 인도네시아 선거법상 대통령·부통령 후보가 되려면 40세 이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헌법재판소는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연령 제한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헌법 소원을 받아들였다. 조코위 대통령의 매제인 헌재소장이 사건을 기피하지 않은 것이 알려지며 논란이 됐다.

캄보디아에선 38년간 장기 집권했던 훈센(72) 전 총리의 장남 훈마넷(46)이 지난 8월 총리가 됐다. 훈센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이 지난 7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직후 훈마넷이 새 정부 지도자로 등장했다. 훈마넷은 2021년 후계자로 지명된 뒤 외교 행보를 벌이며 권력 승계를 준비해왔다. BBC는 총선 당일 풍경에 대해 “오랫동안 준비된 권력 세습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선거라기보다 대관식처럼 느껴졌다”고 표현했다.


필리핀에선 지난해 6월 독재자의 아들과 전 대통령의 딸이 나란히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66) 전 상원의원과 로드리고 두테르테(78) 전 대통령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45) 전 다바오 시장이 지난해 5월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65년부터 20년 넘게 집권하면서 반대파를 고문·살해한 독재자로 악명을 떨쳤다.

태국에선 탁신 친나왓(74) 전 총리의 막내딸인 패통탄 친나왓(37)이 정치 입문 2년 만에 집권 프아타이당 대표가 됐다. 패통탄은 지난 5월 총선에서 총리직을 기업가 출신 세타 타위신에게 양보했지만, 새 정부의 최고 실세로 평가받는다. 2001~2006년 재임한 탁신 전 총리는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이후에도 태국 정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탁신 가문에선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과 매제 솜차이 웡사왓까지 3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싱가포르에선 1959년부터 31년간 집권한 ‘국부’ 리콴유 전 총리의 아들 리셴룽(71) 총리가 2004년부터 20년째 집권하고 있다. 리셴룽 총리의 장남인 리홍이(36)가 ‘3대 세습’을 완성할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지난해 로런스 웡 부총리 겸 재무장관이 차기 총리로 낙점되면서 3대 세습은 일단락됐다.

동남아 지역의 문화적 특성과 경제 상황 등으로 인해 권력 세습 양상이 오랫동안 나타나고 있다. 장준영 사이버한국외국어대 베트남·인도네시아학부 교수는 “동남아 지역 국민들 사이에는 국가를 하나의 가정으로 보는 관점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족벌 정치의 뿌리가 깊은 편”이라며 “유력 가문이 권력을 잡으면 그 집안에서 정치인 2, 3세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현대 국가를 수립할 때 큰 역할을 했던 ‘국부’ ‘국모’의 후손들이 인기를 얻고 정계에 자리 잡곤 한다”면서 “독재자 집권기에 경제 호황을 누렸던 향수가 독재자 후손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주변 강대국인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권력 세습 현상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파빈 차차발퐁푼 일본 교토대 동남아시아학과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중국의 부상은 동남아 지역의 전반적 민주주의 쇠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이니셔티브를 통해 동남아 지역에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민주주의 발전에 불리한 환경이 조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반면 서방 등 기존 민주주의 국가들은 민주주의를 대변하려는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수의 유력 가문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면서 신진 세력의 정치 참여가 봉쇄되는 것도 문제로 지목된다. 태국 야당인 전진당(MFP)는 지난 5월 총선 때 젊은층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가장 많은 의석을 얻었지만, 군부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집권에 실패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시아 각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며 “캄보디아의 경우 최근 야당 배제와 언론 탄압 등 강권 통치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전했다.

장 교수는 “동남아 경제가 발전해야 신진 계층이 등장하고 정치적 다원화가 이뤄질 것”이라며 “향후 수십년 동안은 권력 세습 현상이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