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백인 청년 다문화 새 가족 꾸리기까지…이창래의 변신[BOOK]
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RHK
남성, 백인, 미국인, 중산층…
틸러는 세상이 '주류'라고 규정하는 것들의 집합체다. 그는 부유한 백인 동네 던바에서 살며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다. 대기업 관리직에 있던 아버지는 평생 안정적으로 자원을 공급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성장기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와의 데면데면한 관계, 학교나 지역 사회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체성, 열 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싱글맘 여자 친구, 8%에 불과하긴 해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소수 인종(한국인)의 피 같은 복잡다단한 특징이 숨겨져 있다.
틸러는 골프장에서 캐디 아르바이트하던 어느 날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이자 화학자인 중년 남성 퐁 로우와 만난다. 퐁 로우는 거대한 저택에 살며 벤틀리를 모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로우는 화학 전공이라는 특기를 이용해 여러 감미료를 개발했고 요식업에 진출해 요거트 아이스크림, 핫도그 프랜차이즈를 거느리고 있다. 어느 날 틸러는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시식하고 평을 남겨달라는 로우의 요청을 받고 그의 사업장을 찾는다. 로우는 틸러의 미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에게 자신의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야기는 두 개의 큰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퐁 로우와 틸러가 만나고 친해지는 과정과 이들이 함께 하와이, 선전, 마카오, 홍콩 등으로 비즈니스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 하나의 큰 축이다. 로우는 인도네시아의 약용 식물 '자무'를 이용한 고급 건강 음료를 만들어 전 세계에 팔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다. 틸러는 기꺼이 그의 조수가 되어 동아시아로의 긴 출장에 따라나선다.
나머지 하나는 틸러와 그의 여자친구 '밸'의 이야기다. 오랜 출장의 끝에서 틸러는 우연히 30대 싱글맘 '밸'과 그의 아들 '빅터주니어'를 만난다. 밸은 남편이 불법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을 알고 이를 당국에 고발해 증인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 보복 범죄가 두려워 아이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 하는 '은둔 모자'는 틸러를 새 가족으로 맞으며 여러 변화를 겪는다.
『타국에서의 일 년』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중산층 백인 청년의 성장기'다. 큰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어머니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을 채울 수 없어 방황하던 청년이 퐁 로우와 밸을 만나 변화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젊은 백인 중산층 남성의 결핍을 채워주는 인물이 초등학생 아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못하고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사는 싱글맘(밸)과 중국 억양이 짙게 배어있는 영어를 쓰는 유색 인종 남성(퐁 로우)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가족'이라는 테마에 집중해 보는 것도 좋겠다. 틸러는 외동아들이다. 엄마 없이 자란 그에게 가족은 아빠 한 명뿐이다. 그나마도 해외 체류 사실을 출국 이후 알릴 만큼 데면데면한 사이다. 그런 틸러에게 퐁 로우는 아버지, 밸은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다. 혈연관계에서 생겨난 공허함을,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오히려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완벽한 타인을 통해 해소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작품은 이창래가 장편 『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자 여섯 번째 장편이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이방인의 삶을 다뤄온 전작들과 달리 스무살 백인 청년의 성장기라는 색다른 소재를 택했다. 이창래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영원한 이방인』은 사설탐정인 헨리 박이 같은 한국계 거물 정치인의 파멸을 목격하며 느끼는 정체성 혼란을 다뤘다. 아니스필드-볼프 도서 상을 비롯한 미국 문단의 4개 주요 문학상을 받은 두 번째 장편『척하는 삶』은 세계 2차 대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해 한국인 위안부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었던 한국계 일본인의 삶을 그렸다. 2004년 세 번째 장편『가족』을 통해 좀 더 보편적인 주제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나가며 '진화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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