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허공에 낚싯대 세우고 기다리던 노인의 정체
[이완우 기자]
▲ 지리산 영원사 지리산 주능선 조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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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인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한때는 내지리(內智異)에서 사세(寺勢)를 크게 펼쳤던 영원사(靈源寺)가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9세기 후반에 영원 대사가 창건하여,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 시대에 부용(芙蓉) 영관(靈觀), 청허(淸虛) 휴정(休靜), 사명(四溟), 유정(惟政)과 청매(靑梅) 인오(印悟) 등 수많은 고승이 수행에 전념하여 조선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11월 초 단풍이 어우러진 늦가을 숲의 산행은, 고즈넉한 정적에 눈과 귀가 맑아져서 사색을 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양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 2.5km의 임도가 포장되어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영원사는 지리산을 10km 마주 보고 있는 삼정산(三丁山, 1,156m) 아래 동남향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며, 도솔암에서 실상사에 이르는 지리산 칠암자 산길의 한 사찰이다.
영원사 도량에서 무량수전, 삼영전과 산령각 등 전각을 둘러보았다. 이 사찰에 전해오는 영원 대사의 사찰 창건 연기담, 인오 조사의 수행담과 백초월 스님의 항일 독립운동 등 수행자들의 이야기는 전설, 설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전승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 지리산 영원사 무량수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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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영원사 무량수전 앞 돌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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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승은 지리산에 도착하여 현재의 영원사 터 가까운 곳의 토굴에서 정진 수행했다. 8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영원 대사는 깨우침을 얻지 못하여 이 산을 그만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 노인이 산에서 숲 속의 허공에 낚싯대를 세우고 고기를 낚고 있었다.
노인은 이 산에서 8년 동안 물고기를 기다렸다면서, 2년을 기다려 더 채워보겠다고 했다. 영원 대사는 이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발걸음을 옮겼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단다. 산에서 물고기를 낚는 이 노인은 아마 동자승을 지리산으로 보내고 제자의 득도를 기원하며 기다리는 범어사 스승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영원 대사가 도를 깨우치고 금정산 범어사를 찾아가니, 범어사에 있는 스승은 뱀이 되어서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영원 대사는 자신이 동자승으로 지리산에 올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스승의 금기를 어겨서 스승이 뱀이 된 것을 알았다.
범어사의 스승은 도를 깨우친 영원 대사를 보고는 바로 죽어서 남자아이로 환생했고, 영원 대사는 지리산 이곳 삼정산 자락에 영원사를 창건했다.
영원 대사는 범어사의 스승이 환생한 아이에게 승방에서 공부하게 하며, 승방의 작은 창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지성으로 수행하라고 했다. 몇 년 지나서 과연 황소가 창 구멍으로 뛰어 들어오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아이가 황소가 들어온다고 외치는 순간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영원사 사찰 창건 연기담은 제자의 성공을 바라며 사사로운 정을 끊고 수행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 스승의 바람과 제자가 성공하여 다시 스승을 깨우침으로 이끈 사제 간의 끈끈한 정리로 이어진 이야기로서 마음에 와 닿는다.
▲ 지리산 영원사 삼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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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중기에 청매 인오[1548-1623] 조사는 영원사에 거처를 두고, 가까운 산 중턱의 토굴에서 참선 수도했다. 그는 틈틈이 산죽을 잘라 조리를 만들고 소나무의 관솔을 잘라서, 험한 산길을 걷고 고개를 넘어서 함양의 장터에 내다 팔았다.
그는 장터에서 물건값은 주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 팔리지 않은 물건은 그대로 장터에 두고 와서 누군가 가져가서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하며 산속 승려로서 백성들과 소통하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영원사에서 수도하는 중에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능선 허리를 넘어 함양 장터까지 150여 리 길을 하루에 왕래하곤 했는데, 어느 날 오도재(悟道峙)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함양의 오도재는 '인오 조사의 함양 장에 가는 길의 고개'라는 뜻과 '도를 깨우친 고개'라는 뜻의 중의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지리산 영원사 도량 가을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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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오 조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조선 불교의 중흥에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지었는데,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지 않는다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心不返照 看經無益]."는 등 수행자들이 참고할 만한 열 가지 경책을 열거한 내용이었다.
인오 조사는 노년에 영원사 조실로 있었다. 그가 열반에 든 날, 절터가 환한 빛으로 둘러싸였다. 영원사 동쪽 능선에 스님의 사리를 모아 사리탑을 지었는데 밝게 빛나서 방광사리탑이라고 불렀다고한다.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수행자 백초월 스님
영원사는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이 13세에 출가한 수행 도량이었으며 마음의 고향이었다.
초월 스님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를 발표했고, 의용승군제를 추진했다. 그해 7월, 천은사(泉隱寺)와 화엄사(華嚴寺) 등 여러 사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했고,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길림(吉林)으로 파견했다.
그는 지속적인 항일 독립운동과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한 뒤에도 미치광이로 행세하며 활동을 계속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구속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정신이상자로 석방되었으며, 친일 승려를 강하게 규탄했다.
1939년 초월 스님과 가까웠던 신도가 만주로 탈출하면서 봉천행(奉天行) 화물 열차에서 '대한독립 만세'라고 글씨를 쓴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순국했다.
▲ 지리산 영원사 산령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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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사 도량에서 동남쪽으로 지리산 주능선이 조망된다. 영원사 경내는 정성스러운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어 맑고 깨끗한 산사의 풍경이 단아했다. 영원사의 오후 햇살에 사찰 앞에 드리우는 산그늘이 갈색 풀밭과 초록색 풀밭과 어울리면서, 검은 화강암인 마천석의 큰 바위로 정연하게 쌓은 가람 앞의 축대와도 잘 조화된 풍경이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지리산 삼정산의 유서 깊은 사찰인 영원사에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백견불여일문(百見不如一聞), 백행불여일문(伯行不如一聞)'이라고 되뇌어 보게 된다.
▲ 지리산 영원사 도량 앞 가을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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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 지리산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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