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자금 빨아들이는 '정기예금ABCP' 폭증 …CP시장 불안 요인
수신 금리 많이 올리지 않고도 대규모 예금 유치하는 '우회 수신' 수단
투자자금 쏠림에 일반기업 CP 수요 위축 우려
은행권의 수신 경쟁이 심화하면서 자본시장에서 정기예금을 담보로 발행하는 ‘정기예금유동화어음(정기예금ABCP)’ 발행량이 삐르게 늘고 있다. 정기예금ABCP는 은행 입장에서 수신 금리를 많이 올리지 않고도 대규모 예금을 유치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다. 최근의 은행채 금리 상승도 우회 수신 수단인 정기예금ABCP 발행량 증가 원인으로 분석된다. 단기자금의 투자 수요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정기예금 ABCP로 몰리면서 단기 금리를 끌어올리는 등 시장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들, ABCP 통한 정기예금 유치 줄이어
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이달 1일 국민은행은 현대차증권, 수협은행, 신한투자증권의 신탁계정을 통해 2470억원의 1년 만기 정기예금을 유치했다. 예금에 가입한 3개 금융회사는 각각 신탁수익증권을 발행해 특수목적법인(SPC)에 매각했다. SPC는 정기예금 신탁 수익증권을 담보로 2~5개월 만기의 ABCP를 발행해 정기예금 가입 재원을 마련했다. 정기예금을 담보로 ABCP를 발행해 조달한 자금이 신탁을 거쳐 국민은행 정기예금으로 흘러 들어간 셈이다.
하나은행도 전날 같은 방법으로 2409억원의 1년 만기 정기예금을 유치했다. 신한투자증권이 신탁을 통해 정기예금에 가입하고, 신탁수익증권을 유동화해 예금 가입 자금을 마련했다. 농협은행도 이달 들어 하이투자증권 신탁을 통해 만기 1년 미만인 2646억원어치의 정기예금을 받았다.
증권사 신탁을 통한 정기예금 유치는 10월부터 폭증했다. 업계에 따르면 10월 한 달간 정기예금ABCP 순(純)발행액은 4조5000억원으로 올해 들어 최대 규모를 나타냈다. 은행들의 정기예금 만기가 4분기에 많이 몰려 있는 데다, 은행채 금리가 상승하면서 상대적으로 조달 비용이 싼 정기예금 유치가 늘어난 것으로 해석된다.
단기자금 시장의 투자 수요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정기예금ABCP로 몰리고 있는 것도 발행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IB업계 관계자는 "머니마켓펀드(MMF)·신탁(MMT)·랩어카운트(MMW) 등의 자금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정기예금ABCP로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CP시장 구축효과’ 우려…자금시장 불안 요인으로
정기예금ABCP 증가가 CP 등의 단기자금 시장에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기예금ABCP 공급 물량이 증가하면서 최근 CP 시장 금리를 가파르게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9월초 3.990%였던 91일물(약 3개월 만기) CP 금리는 지난달 27일 기준 4.29%를 기록했다. 최근 약 2개월간 30bp(1bp=0.01%포인트) 오른 수치다. 증권 업계 관계자는 "특히 추석 연휴와 한글날 등 휴일이 많고 영업일수가 적은 10월에 금리 오름폭이 가장 가팔랐다는 점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정기예금ABCP가 단기자금 시장의 투자 수요를 상당 부분 잡아먹는 구축효과 발생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당국이 MMF와 MMW 등의 만기 미스매칭 운용을 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면서 단기자금 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이 줄어든 것도 CP 금리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MMF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단기자금 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이 한동안 정체된 가운데 정기예금ABCP가 10월에만 4조5000억원어치 순발행됐다"면서 "순발행 물량만큼 다른 CP나 단기사채에 투자할 수요가 줄어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전력공사와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의 CP 발행이 늘어난 것도 CP 시장 불안 요인 중 하나"라고 지목했다.
IB업계 관계자는 "단기자금 시장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심화하면 CP 시장의 금리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면서 상대적으로 낮은 신용도를 보유한 기업들의 단기자금 차환이나 신규 발행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면서 "자금 시장의 불안 요인이 전반적으로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임정수 기자 agreme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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