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이스라엘, 실패한 전쟁
비인도적 전쟁의 가해자로
180도 뒤바뀐 이스라엘 처지
정보전과 경계전 실패 이어
국제사회 공감을 끌어내는
여론전도 완벽하게 패배
극심한 국론 분열 상황서
공격당한 이스라엘 정부
절제된 대응 택할 역량 못갖춰
결국 실패한 정치가
실패한 전쟁을 불렀다
지난달 7일 이스라엘을 기습한 하마스 대원들은 총기만큼 많은 촬영 장비를 소지하고 있었다. 옷에 부착하는 바디캠부터 고성능 액션캠까지 숱한 렌즈가 그들의 ‘전투’를 찍었다. 작전이 끝나자 텔레그램에 녹화중계하듯 영상을 쏟아냈는데, 그중 44초짜리 편집본에 두 아이가 등장한다. 이스라엘 홀리트 키부츠의 가정집에서 촬영됐고, 아이들은 그 집에 사는 세 살 네게브와 생후 5개월 에셀 형제였다. 영상은 하마스 대원이 네게브의 다친 발에 붕대를 감아주는 장면으로 시작해 칭얼대는 에셀을 안고 등을 토닥이는 다른 대원, 네게브를 무릎에 앉혀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에셀의 유모차를 흔들어주는 또 다른 대원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전쟁 중에도 아이를 돌본다는 ‘훈훈한’ 시선의 영상은 그러나 그 집에 함께 있던 아이들의 엄마를 무참히 살해한 뒤 찍은 거였다. 반인륜적 만행을 앵글에서 쏙 빼놓은 이 영상은 알자지라 페이스북에 게재돼 조회수 140만, 좋아요 75만, 칭찬 댓글 7000건을 기록했다. 하마스가 편집한 각종 영상에는 저마다 이렇게 특정 시청자를 겨냥한 관점이 들어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복수의 희열을 주는 영상(예를 들어, 하마스 대원이 전투 중 집에 전화해 “엄마, 내가 12명이나 죽였어”라고 환호하는 장면), 아랍인들에게 이스라엘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메시지를 주는 영상(이스라엘군이 허둥대다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 등등. 그들은 선택적 소비라는 SNS 영상 유통의 생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가장 공들인 타깃 시청자는 이스라엘인들인 듯했다. 일가족을 태워 죽이고, 시신을 유린하고, 인질을 전리품인양 다루는 끔찍한 영상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스라엘인의 분노와 모욕이 극대화하도록 편집해 일부러 공개한 영상들은 이스라엘군을 가자지구로 부르는 초대장처럼 보였다. 함정을 파놓은 이들이 적을 자극해 유인하듯이. 2008년 만모한 싱 인도 총리가 보여준 자제력(파키스탄 무장단체 테러에 민간인 160명이 희생됐지만 군사적 보복 대신 외교를 통한 사법적 응징을 택했다)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갖고 있지 않았다.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와 공습과 진군이 차례로 이어졌고, 상황이 어떻게 반전됐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반인륜적 테러공격의 명백한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은 비인도적 전쟁범죄의 가해자가 됐다. 불과 열흘 만에.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라는 ‘진실’은 이번 전쟁에서 지난달 17일 가장 크게 희생됐다. 가자의 알 아흘리 병원에 폭탄이 떨어지자 하마스는 즉각 이스라엘 공습 탓이라 주장했다. 며칠 뒤 팔레스타인 측 오발이란 증거가 나왔지만,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이스라엘 규탄시위가 벌어지고, 미국-아랍 정상회담이 취소된 뒤였다. 이후 하마스의 텔레그램 영상은 180도 달라졌다. 민간인 참상에 초점을 맞춘 ‘가자의 비극’이 메인 테마가 됐고, 그런 영상이 쌓여갈수록 이 전쟁을 바라보는 국제 여론의 시선은 역사를 향하게 됐다. 비극의 가자는 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감옥이 됐는가? 이 자연스러운 궁금증이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 논쟁과 폭력에 더 큰 폭력으로 맞서온 이스라엘 전쟁사를 들춰내며 반(反)유대 정서는 더욱 확산됐다.
지금 세계는 유대인으로 살기에 매우 위험한 곳이 됐다. 이스라엘 여객기가 폭력시위 타깃이 되고, 유대인 혐오 범죄가 몇 배씩 급증하고, 유대인 커뮤니티 시설들이 안전 문제로 문을 닫는다. 미국 연방수사국장은 “유대인 공동체는 거의 모든 테러집단의 표적이 되고 있다”면서 “역사적 수준의 위협”이라 진단했다. 가자지구 접경지역에 국한됐던 하마스의 공격이 한 달 만에 그 사정권에서 한참 떨어진 세계 각지의 유대인을 위협하게 된 나비효과는 네타냐후 정부가 자초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보전과 경계전에 실패해 선제공격을 당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공감을 끌어내는 여론전에서도 완벽하게 패배했다.
이렇게 되리란 경고는 많았다. “하마스의 만행은 덫”이란 전문가 분석이 쏟아졌고, 바이든이 찾아가 “9·11의 전철을 밟지 말라” 충고한 것도 그 얘기였다. 네타냐후의 극우 노선 탓에 극심한 국론 분열 속에서 공격당한 이스라엘은 이런 경고에 귀기울일 정치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국민의 분노를 감당하며 큰 그림을 보고 하마스와 주민을 분리해 대응하는 절제된 방식을 택할 힘이 없었다. 결국 실패한 정치가 실패한 전쟁을 불렀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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