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정의로운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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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 죽음이 흔하다.
먼 나라의 전쟁과 지진, 죽음의 소식이 매일 들리고, 나라 안에는 안타까운 희생을 기억하는 날과 슬퍼하는 유족이 자꾸 늘어난다.
수십 년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해 온 지역에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이 이스라엘 사람이면 불쌍하고 팔레스타인인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으로 죄를 넘어 희생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악행이다.
전쟁과 지진, 각종 참사가 이어진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교회가 애도와 위로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제대로 했는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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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 죽음이 흔하다. 먼 나라의 전쟁과 지진, 죽음의 소식이 매일 들리고, 나라 안에는 안타까운 희생을 기억하는 날과 슬퍼하는 유족이 자꾸 늘어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이라지만, 피할 수 있었던 전쟁과 사고로 가족을 잃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고통은 잔인하게 개인적이어서 사랑하는 사람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 내 손톱 끝의 작은 거스름이 스쳐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지만, 다른 사람이 크게 다쳐도 나는 아프지 않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그러한데 먼 곳에서의 전쟁과 지진, 한참 전에 일어난 안전 참사는 말할 것도 없다. 수천 명이 사망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이 사무치는데도 잠시의 슬픈 느낌과 기도 후에는 나의 평범한 일상이 이어진다.
대상에 따라 그들의 고통을 달리 공감하는 것이 부정적인 일만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에 똑같이 공감한다면 괴로워서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 자신으로부터의 거리나 시간의 경과에 달라지는 것은 그래서 은혜로운 보호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슬픔과 고통을 다른 비율로 나누고, 그것을 통해 각자가 감당해야 할 애도와 위로의 분량을 채운다.
무서운 것은 그 애도조차 차별적으로 되는 경우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막연하게라도 ‘우리 편’이라 생각하는 누군가의 아픔에는 조금이나마 반응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약간의 공감마저 식어버리고 만다. 외국인보다는 한국 사람,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보다는 서양에서 온 관광객, 팔레스타인의 피난민보다는 이스라엘의 무고한 시민…. 이들의 고통을 우리는 달리 평가하고 차별적으로 애도한다. 나와 그들 사이에 있는 시공간과 형편의 차이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겪는 일에 대한 우리 몸과 마음의 반응, 그리고 기억의 연한은 지나치게 다르고, 그래서 정의롭지 못하다. 은혜로운 보호 장치가 차별과 혐오로 망가지는 순간이다.
사랑이 균형을 잃으면 편애가 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슬픔, 위로도 균형을 잃으면 폭력이 된다.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람이 버스정류장에 있었는지 술집에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수십 년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해 온 지역에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이 이스라엘 사람이면 불쌍하고 팔레스타인인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으로 죄를 넘어 희생자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악행이다. 원수를 사랑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애도의 순간에조차 일어나는 차별과 혐오를 이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전쟁과 지진, 각종 참사가 이어진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교회가 애도와 위로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제대로 했는지 자문해 본다. 내 편이 누구인가를 먼저 따지느라 평화를 외쳐야 할 때 잠잠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한 경우가 없지 않고, 진리 수호를 명분 삼아 강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교회나 개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대한 간증과 감사는 환영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문제를 마주하는 것은 힘들어하거나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이태원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들려오는 고난의 소식에 함께 울기보다는 어찌할 줄 몰라 침묵하거나 차라리 고난의 원인을 찾고 책임져야 할 대상을 지목하는 일로 눈을 돌리곤 한다.
그러나 고통받는 세상의 부조리, 전쟁, 질병,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고 이웃이 누구이든 그 고통의 일부를 나누는 일이 기독교회의 사명이다. 이어지는 전쟁과 재난의 소식이 교회를 다시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불리해도 약한 자의 편에 서며, 애도의 연대에서도 정의로워야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손화철(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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