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세 모녀의 여행
더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
가족의 존재를 기억하게 한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엄마와의 여행은 동생 때문에 시작됐다. 비행기로 11시간 걸리는 이곳은 대학생 신분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던 여동생이 20년째 살고 있는 도시다. 초기엔 주로 동생이 한국에 왔지만 조카가 태어난 이후엔 엄마와 내가 일 년에 한 번 정도 방문하는 편이다. 각자의 일을 멈추고 일주일 남짓 함께 지내는 시간은 떨어져 사는 세 모녀가 손꼽아 기다리는 연례행사다.
먼 곳이지만 동생 집에 머물 거라서 여행 준비는 간단하다. 일단 비행기에서 내리기만 하면 동생의 에스코트가 시작된다. 동생이 쓰는 화장품을 사용하고 예상보다 춥거나 더우면 동생 옷 중에 입을 만한 것을 찾는다. 조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동생이 일하는 곳을 구경하고 동생이 좋아하는 숍과 음식점에 간다. 각자의 일상에서 동생의 일상으로 떠나온 여행이기도 하다. 엄마와 나는 동생 사는 모습에 대견해하며 안심한다. 하지만 손으로 입 주변을 만지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냐는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밤에는 모여서 패션쇼를 벌이거나 드라마를 본다. 의식주를 나누는 세 여자에겐 모든 것이 대화의 소재가 된다. 엄마는 이래서 딸 둘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멀리 사는 딸과 거기 데려가 줄 딸까지. 나 역시 여자 형제가 있어 좋다. 우린 동생이 중3 때까지 16년을 같이 살고, 이후론 진학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가끔 만나긴 했지만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웠지만 동생이 결혼하고 조카가 태어나면서 다시 연결되고 뭉쳐졌다.
출국하기 며칠 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 표 취소되니? 나 엉덩이랑 다리 아파서 뉴질랜드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무슨 일 있었어? 얼마나 아픈데 그래? 그렇게 기다렸으면서 무슨 소리야. 무조건 가야지.” 70대 중반인 엄마는 몇 년 사이 부쩍 허리도 굽고 아픈 곳이 많아졌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걸음도 빨랐던 엄마의 중년을 기억하는데 몇 걸음 떼는 것도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니 충격적이기도 하고 심경이 복잡해졌다.
동생은 우리를 위해 퀸스타운 여행을 예약해 놓았었다. 오클랜드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걸리는 퀸스타운은 스키나 트레킹, 빙하 체험 등 대자연을 즐길 수 있는 세계적 관광지다. 유튜브와 게임이 제일 좋은 8살 조카와 잘 걷지 못하는 70대 노모와 퀸스타운에 가도 괜찮을까, 걱정은 기우였다. 눈길 닿는 곳마다 멋진 자연 경관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조카와 엄마는 매일 호텔 수영장과 사우나에서 몇 시간을 보내며 만족해했고 눈바람이 거센 날엔 다 같이 겨울 점퍼를 사 입었다. 별 거 안 했지만 만년설로 뒤덮인 산들을 보며 밥을 먹고 맥주를 한 잔 하는 것만으로 특별한 시간이었다.
인구의 고령화는 뉴질랜드에서도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어딜 가나 다양한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 건강의 이상 신호에 위축돼 “늙으면 다 이렇지 뭐. 해외까지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했던 엄마는 뉴질랜드에서 목격한 노인들을 통해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된 것 같다. 미술관의 시니어 도슨트, 데이트를 하는 흰머리 커플, 젊은 옷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노인들 모습에 엄마는 “이 나라엔 멋쟁이들이 많은가봐” 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는 거울 앞에 서더니 몸을 이리저리 돌려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운동 좀 하라는 자식들의 성화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앞으로 세 모녀의 여행은 몇 번이나 더 이뤄질까. 우리는 어쩌다 뉴질랜드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나기도 한다. 함께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서로를 더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 만나지 않는 날에도 가족의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이 여행이 오래 가능하길 바란다. 물론 아빠와 여동생의 남편, 그리고 남동생의 지지와 조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 그들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정지연(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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