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남녘의 절해고도, 영국은 왜 이곳을 점령했나

2023. 11. 3.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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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지브롤터’ 거문도


김정탁 노장사상가
전남 여수에서 쾌속정을 타고 남쪽으로 2시간 정도 달리면 동백나무가 무성한 섬을 만난다. 거문도다. 거문도는 동백나무 숲이 무성해 이 숲길을 걸으면 한낮에도 어둡다. 그래서 어둡다는 검음에서 거문도란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이 섬은 동도·서도·고도로 구성되는데 세 섬이 삼각형 형태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그 안이 호수처럼 잔잔한 천혜의 항구다. 그런데 이런 잔잔함과 달리 거문도는 19세기 말 국제정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제정 러시아가 동북아 진출을 위해 거문도에 눈독을 들이자 영국이 이를 눈치채고 미리 점거해 동양의 지브롤터가 되어서다.

「 19세기 말 국제정치의 압축파일
러시아 남진정책에 영국 견제구

국토 앗기고도 조선은 속수무책
지배층 분열에 열강의 싸움터로

청일전쟁·러일전쟁 잇따라 터져
개혁기회 놓치며 백성만 피눈물

이베리아 반도와 한반도

남쪽에서 바라본 거문도. 오른쪽 섬이 거문도항이 있는 고도다. 영국군은 여기에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사진 김정탁]

지브롤터는 스페인 최남단의 영국령인데 아프리카 대륙과 인접해서 마주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충지다. 수에즈 운하가 완성되기 전까진 이탈리아·그리스·튀르키예 등 지중해권 나라가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면 대서양에 진출하지 못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여서 흑해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간신히 빠져나와 지중해로 나와도 지브롤터에서 막히면 대서양 진출은 물거품이 된다. 영국이 여기를 1713년부터 점거했으니 러시아로선 큰 낭패였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도 마찬가지 효과를 지녀 동북아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에는 동양의 지브롤터와 같았다.

김경진 기자

영국은 어째서 이베리아반도 끝과 우리 남해안에서 러시아의 발목을 잡았을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후 유럽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했는데 부동항이 없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 영토 확장을 위해서 노심초사했다. 이에 남진 정책을 과감히 펼쳤는데 영국에게는 자신의 식민지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19세기 내내 세계 도처에서 대립했고, 마침내 크림전쟁(1854~1856)으로 충돌했다. 크림전쟁은 나이팅게일의 신화로 유명하지만, 영국이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벌인 최초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에 패했어도 미국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또다시 영국을 견제했다. 이에 따라 크림전쟁이 끝나고 5년 후에 발발한 미국 남북전쟁(1861~65)에서 남군을 지원한 영국과 달리 러시아는 링컨의 북군을 지원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867년 알래스카를 미국에 헐값에 팔았다. 크림전쟁 여파로 생겨난 러시아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는데 알래스카를 획득한 미국을 통해 당시 영국령이던 캐나다를 지리적으로 압박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러시아의 남진 “부동항을 찾아라”

북쪽에서 바라본 거문도. 왼쪽이 동도, 오른쪽이 서도인데 그 사이에 고도가 있다. 왼쪽 다리가 동도와 서를 잇는 다리다. [사진 김정탁]

러시아의 남진 정책은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그래서 이미 점령한 우즈베키스탄·투르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인도양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인도를 식민지로 둔 영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졌는데 러시아는 이에 개의치 않고 남진의 범위를 동북아로 확장했다. 1858년에는 청(淸)과 아이훈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차지해 동북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2년 후인 186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해 부동항을 확보했다. 1891년에는 육로로도 눈을 돌려 9300㎞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착수했다.

거문도 고도에 있는 영국군 묘지. [사진 김정탁]

그런데도 러시아는 한반도 부근에서 새로운 부동항을 찾기 위해 애썼다.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효용 가치가 높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1860년부터 40년간에 걸쳐 조선·일본·중국 연안 등지에서 부동항을 물색했다. 그 결과 영흥만(원산만)과 제주도, 쓰시마가 최종 물망에 올랐고, 1861년에는 러시아 군함이 쓰시마에 반년이나 머물렀다. 러시아는 이 중에서 영흥만을 가장 탐내 1884년에 조선과 서둘러서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톈진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선조정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의 도움을 받아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간섭에 오랫동안 지친 조선에 친러의 씨앗을 심었다.

러시아가 군사교관 파견의 대가로 영흥만을 차지했다는 소문에 영국은 1885년 4월 거문도로 향했다. 이때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톈진조약이 체결된 직후이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 10년 전이었다. 영국의 동양함대 사령관 도웰 제독이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발해 다음 날 거문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유니온 잭 기를 게양하고 포대를 구축해 병영을 건설한 뒤 군사기지로 만들고서 영국 해군장관의 이름을 따 해밀턴항으로 명명했다. 처음 200명이던 병사가 800명으로 늘고, 함대도 10척 규모로 커지자 조그만 섬이 갑자기 북적거렸다.

‘아시아의 발칸반도’가 된 조선

거문도 고도의 거문초등학교. 이곳에 영국군 기지 사령부가 있었는데 이 운동장에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이 만들어졌다. [사진 김정탁]

조선은 영국 공사관을 통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 통보를 받았어도 발만 동동 굴려야 했다. 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일본과 미국도 관망하거나 동조해서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남하를 큰 위협으로 느껴 영국을 통해 이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에 힘입은 영국은 거문도를 조차하기 위해 조선의 보호국임을 자처하는 청과 교섭했다. 그런데 조선의 속국화에 관심이 많던 리훙장의 반대로 교섭이 더디어지자 조선과 직접 교섭에 나섰다. 이때 영국은 거문도 임차비용으로 매년 5000파운드(현재 기준 약 35억원)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에도 러시아로 기울었던 조선 조정이 돈으로 영토를 거래하는 건 불가하다며 교섭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했던 영국과 러시아 간에 협상이 타결돼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할 명분이 없어졌다. 그래서 영국은 2년 만에 거문도에서 철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은 극도의 무력감을 나타냈다.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음에도 지배층의 무지와 무능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편 청은 거문도 사건의 해결에 중재자를 자처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자 한반도는 유럽의 발칸반도처럼 동북아의 화약고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친청파·친일파·친러파의 갈등

거문도 서도 남쪽 끝에 있는 등대.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다. [사진 김정탁]

이런 상황인데도 조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배층은 친청파·친일파·친러파 등으로 나누어져 청·일·러시아의 앞잡이 내지는 대변자로 둔갑했다. 또 고종과 민씨 일족은 친일에서 친청으로, 다시 친러로 입장을 계속 바꾸었다. 동북아에서 부동항 획득은 러시아에는 생명선 확보와 같아서 어차피 조선에 접근해야 했다. 그런데도 고종과 민씨 정권은 권력에 집착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오히려 애썼다. 이에 따라 베베르 러시아 공사와 2주 만에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서울 정동의 22만 평 땅을 거의 공짜에 파는 등 온갖 편의를 러시아에 제공했다.

차준홍 기자

급기야 고종은 아관파천까지 단행했다. 민비가 살해된 후 신변에 불안을 느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인간이 왕이었으니 백성만 불쌍하다는 느낌이 든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갑오경장으로 왕정(王政) 대신 입헌군주제에 따른 헌정(憲政)이 시작되는 게 싫어 피신한 거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고종의 무능함만 더욱 드러낼 뿐이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에선 더 이상의 개혁은 고사하고, 이미 시작된 갑오경장의 개혁마저 뒷걸음쳤다.

거문도 주민이 영국인과 어울려 찍은 사진. [사진 김정탁]

거문은 ‘클 거(巨)’에 ‘글월 문(文)’인데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조선조정이 점령군 영국군과 교섭하기 위해 거문도에 갔을 때 청의 북양함대 사령관 띵루창(丁汝昌)도 동행했다. 그런데 띵루창의 눈에 집집이 사서삼경이 있고 경전을 읽는 사람이 많아 이에 놀란 나머지 ‘큰 문(巨文)’이란 이름이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섬에 물고기를 잘 잡는 실학이 아니라 과거를 위한 학문이 깊게 스며들어 안타깝긴 해도 당시 거문도 주민은 조선의 지배층보다 잘 처신했다고 본다. 절해고도에 주둔한 영국군의 약한 고리를 잘 활용해 영국군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진문물을 접할 기회로 삼아서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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