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전가된 돌봄노동, 그것은 착취였다

김남중 2023. 11. 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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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낸시 폴브레 지음, 윤자영 옮김
에디토리얼, 436쪽, 2만5000원
저자 낸시 폴브레는 돌봄노동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어 왔다고 지적하면서, 돌봄비용을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올해 노벨경제학상이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클라우디아 골딘에게 수여된 것은 주류 경제학이 여성과 돌봄을 비로소 경제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골딘은 미국 대졸 여성들의 누적된 결혼·출산·고용 데이터를 분석해 남녀의 노동시장 참여와 임금에서 격차가 발생하는 원인이 여성의 일(커리어)에 ‘아이가 끼어들기 때문’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골딘의 수상은 경제학이 외면해온 돌봄과 가사 노동, 여성 노동 등을 연구 대상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페미니즘 경제학의 부상을 말해준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낸시 폴브레는 이 분야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석학이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은 폴브레가 평생 개척해 온 ‘돌봄경제학’을 집약한 최신작으로 돌봄경제를 경제학의 핵심 분야로 구축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폴브레는 이 책에서 돌봄의 경제적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재생산’과 ‘공공재’라는 개념을 내세운다. 그는 재생산을 “인간 역량의 생산과 유지”로 정의한다. “사회적 역량의 생산과 유지”는 ‘사회적 재생산’이라고 명명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과 사회의 재생산이 없다면 생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재생산에서 핵심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성장하여 납세자가 되어 국가의 부채 상환을 돕고 노년층을 알게 모르게 부양한다. 인류와 문화, 지역사회, 가족을 영속시킨다.”

근래의 저출산 문제는 재생산이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출산율의 심각한 감소는 재생산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재생산이 안 된다면 경제는 물론 국가의 존속도 위태롭게 된다. 현재의 재생산 위기는 돌봄 문제에서 비롯된다. 돌봄은 그래서 이 시대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로 인식돼야 한다.

재생산을 책임져 온 것이 돌봄노동이고 여성이다. 저자는 “사적이고 사회적인 부를 창출하는 데 여성의 무급 노동은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다”면서 “재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은 생산, 전유, 교환만큼 중요한 과정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제학은 그동안 생산이나 사적 소유에만 가치를 두면서 재생산이나 공공재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해왔다. 특히 여성이 주로 제공하는 돌봄노동의 편익은 사회 전체와 미래에 환원되지만, 돌봄 제공자가 안게 되는 경제적 불이익은 측정되지 않았고 인정받지도 못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치는 시간의 경제적 가치는, 대체 돌봄 제공자를 고용하는 비용의 하한 추정치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주거와 음식, 의복에 대한 직접 지출을 훨씬 초과한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잠시 노동시장을 떠났던 사람들은 연금 자격과 납부 기간에서 손해를 보게 되어 노후 빈곤에 취약해진다. “어떤 지표로 판단해도, 가용한 자료가 있는 사실상 거의 모든 국가에서 여성 노인은 남성 노인보다 빈곤에 더 취약하다. 이는 평생에 걸쳐서 주로 여성인 돌봄 제공자를 착취하게 만드는 집단권력 구조가 반영된 것이다.”

저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돌봄을 전담시켜 온 역사를 조명하면서 이를 착취라고 규정한다. 여권 신장에도 불구하고 돌봄을 통한 여성 착취의 구조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수사학은 사회 지출로 경제가 침체된다고 계속 비난하면서 인간 역량의 생산과 유지를 공공이 아닌 민간 프로젝트로 취급한다. 공공 사회 지출의 삭감은 비용을 납세자에게서 여성과 가족에게 이전한다.”

기업 이윤과 노동자 임금에 세금을 부과해 교육과 연금, 공공 의료를 위한 재정을 조달하는 현대 복지국가는 사회적 재생산 전략이자 개인에게 전가된 재생산 비용을 사회화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복지국가는 일부 진전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문제 해결에 한계를 보이며 세계적으로 그 추진력을 잃었다. 젠더 불평등과 돌봄 비용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사회가 재생산을 책임지지 않은 결과는 현재의 드라마틱한 출산율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젠더 평등을 촉진하지 않고 가족 헌신에 대한 공적 지원을 별로 제공하지 않는 국가들에서 이제 급격히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일본, 한국이 모두 이런 국가 목록의 상위권을 차지한다.”

저자는 “현재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진행 중인 출산율 감소 과정은 복지국가를 포함하여 가족 부양 비용의 분배를 통제하는 사회제도를 두고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압력을 강화한다”며 재생산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돌봄 비용을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둘 다 비판하고 종합하면서 재생산과 비시장 노동을 포괄하는 새로운 경제학을 ‘교차정치경제학’이란 이름으로 구성한다. 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궤적을 조명하면서 여성들의 경제적 빈곤을 유발하는 근본적 이유가 돌봄에 있음을 드러낸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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