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다른 이름 '빨갱이' 아직도 그 타령

변상철 2023. 11. 2.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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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에서 무죄 고 오경무씨 유족 "빨갱이 자식이라고 형을 더 받아"

[변상철 기자]

"'빨갱이' 홍수 단톡방에 진저리...."
-서울경제, 2023. 10. 23

"'빨갱이는 죽음의 단어"...'4.3망언' 태영호 손배소서 눈물 훔친 유족"
-뉴스1 2023. 10. 12

"정권유지 위해 아니면 말고식 빨갱이 만들기"
-오마이뉴스 2023. 9. 21

"빨갱이는 만들어진다"
-경향신문 2023. 9. 27

''홍범도 빨갱이' 국민의 힘 전 당협위원장 징계요청"
-sbs, 2023. 10. 27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논란 등을 거치며 우리 사회에 이념논쟁, 색깔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 이러한 논쟁은 언론매체에서 조차 '빨갱이'라는 언어를 도용할 만큼 심각한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빨갱이라는 단어가 한 쪽의 이념을 이해하는 개념으로 적절한 표현일 수 있을까? 결론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는 반정부적·적대적·사회해악적 의미의 멸칭이다.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천, 일부의 부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오,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 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서 정치노선을 000과 0000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 채만식 <도야지>, 창비사<문장> 27호, 1948년 10월

"우리나라는 특히 나쁜 사람들이 상대편을 공격할 때 종북 좌파라고 이야기합니다.(증략) 자기 반대하는 건 빨갱이로 몰았단 말이에요."
- tbs 2017. 11. 6

빨갱이라는 어원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유격대를 지칭한 '파르티잔(빨치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빨간색 혹은 적화라는 의미보다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의 의미에 더 가깝다. 실제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아카(あか, 빨강)라 불렀다.

일제에 맞서 싸우는 '비적', '빨치산', '항일독립운동가'는 해방 후 '통일', '민주'를 외치다 또다시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렸다. 다시 말해 빨갱이는 정치적으로 자신과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모든 세력을 공격하는 상징적 단어가 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경우 의병, 다시 말해 'partisan(비정규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음에도, 국방부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빨치산=빨갱이라는 개념으로 등치시켜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개념의 빨갱이 논쟁으로 해방 전 일제에 저항했던 모든 독립운동조차 사상 검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모든 이들의 정치적·사상적 견해는 다를 수 있다. 우리 헌법에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누가 어떤 생각과 신념을 가지든 그것이 사회의 법과 질서를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면 허용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 3항은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으로 인한 차별을 금하고 있다.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출생지, 등록기준지, 성년이 되기 전의 주된 거주지 등을 말한다),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 조건, 기혼ㆍ미혼ㆍ별거ㆍ이혼ㆍ사별ㆍ재혼ㆍ사실혼 등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前科), 성적(性的) 지향, 학력, 병력(病歷) 등을 이유로 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다만, 현존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특정한 사람(특정한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을 잠정적으로 우대하는 행위와 이를 내용으로 하는 법령의 제정ㆍ개정 및 정책의 수립ㆍ집행은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이하 "차별행위"라 한다)로 보지 아니한다.
-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3항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특정한 행위나 신념, 정권의 정책에 반하는 비판, 생존을 위한 집회·결사의 행위를 하는 경우 그저 빨갱이라는 논리로 내모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과거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피해자와 가족의 경우 재판을 통해 무죄가 입증되었음에도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굉장한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생활 기반이었던 지역 사회 공동체나 혈연 공동체에서 사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여겨져 결코 공동체와 화합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한국 사회에서 사형 선고보다 더 한 '빨갱이' 낙인은 형기를 다 채우고 석방된 뒤에도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되거나 단절되는 경험을 하게 한다. 피해자 스스로 이러한 소외와 단절, 냉대를 본인 책임 또는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돌리는 등 본인 스스로 내면화 하여 포기하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피해자들의 고통은 <국가폭력고문피해 실태조사보고서>(202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매형이 누나에게 빨갱이 가족이라고 하여 쫓아내어, 그 후 2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 김0수, 1976년 납북어부 간첩 사건 피해자

"저의 어머니는 저의 구속 이후, 소위 빨갱이 집이라는 세간의 입질로 장손 집인 당신의 집에 친척들이 제사 모시러 오는 것을 꺼려할 때 몹시 슬퍼하셨습니다."
- 이0영,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

"그리고 85년도에 들어가서 노조 결성을 주도하였고, 초대 노조위원장을 했습니다. 강원도경에서 저를 조회해 보니까 빨갱이 새끼가 노조위원장을 한다고 난리가 났다고 들었습니다.
- 이0현, 1974년 통혁당 재건위 사건

"다만 같은 부대 동기이면서 당시 이 사건으로 보안대 조사를 받았던 한창원, 김창원에 의하면 '이 놈은 군에 오기 전에 이미 징역을 산 빨갱이다.' '너희들이 빨갱이가 한 언행을 신고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화를 입을 것이다'며 군에서 분명히 반체제 발언을 했을 터이니 신고하라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 김0기, 1981년 부림 사건

"'간첩'이라고 하면 같은 죄수에게도 간수에게도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가 단식을 하면 빨갱이까지도 참여했다고 매도당하니까요."
- 최0교, 1974 간첩 조작 사건

"나와 아이들은 '빨갱이 자식이다'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다."
- 김복재, 1971년 최복남-김복재 간첩 조작 사건

"'너 같은 빨갱이 새끼는 죽어도 누구 하나 동정해 주지 않아. 너 여편네도 데려와서 빨가벗겨 놓고 조져볼까?'라며 협박을 당하였다."
-김0기, 1986년 간첩 조작 사건

"고1 담임이던 국어 담당 김아무개 선생님의 눈초리는 냉담했다. 언제부턴가 '빨갱이 동생'이라는 말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 안0수, 1966 베트남전 실종 가족 고문 사건
 
 무죄선고 후 기자회견 중인 오경무 가족
ⓒ 변상철
 
10월 30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국가보안법 관련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고 오경무씨의 유족은 이러한 빨갱이 소리에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아버지가 예비검속으로 잡혔다며 빨갱이 자식이라고 모욕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2015년에 국가를 상대로 해서 아버지에 대해 배상을 하라는 소송을 했어요. 그래서 승소를 했거든요. 그러니 제가 빨갱이 자식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빨갱이 자식이라고 해서 형을 더 받은 거예요."
- 오경대, 1967년 간첩 사건

여전히 빨간줄의 주홍 글씨를 두려워하며 언론에서 빨갱이라는 말만 나와도 그들이 받았던 사회적 냉소와 지탄, 차별을 또다시 떠올리게 한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사회적 감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피해자들이 일상에서 듣는 빨갱이 소리보다 정치인 등이 언론에서 내뱉는 일상적 언어에 더 몸서리친다는 것이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비판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 이준석 페이스북 캡처
 
유럽연합의 기본권 헌장(2000년 제정) 제21조 1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인종 또는 사회적 출신, 유전적 특징, 언어, 종교 또는 신념, 정치적 또는 기타 의견, 소수 민족 구성원, 재산, 출생, 장애, 연령 또는 기타 사항을 근거로 한 모든 차별 성적 지향은 금지"함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차별금지법' 역시 위의 내용과 다르지 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차별에 대한 정부의 행정적 규범을 정함으로써 차별 행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에 상정된 몇몇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논의가 중단된 상태에 있다.

이러는 동안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빨갱이 소리가 한창이다. 정당, 지식인 등이 언론과 방송, 거리에서 여전히 빨갱이 타령을 하고 있으며 대통령 등의 사과가 이어진 국가 폭력 사건에 대해서도 여전히 빨갱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현직 대통령조차 과거 검찰총장 시절 '검찰의 역사는 빨갱이 색출의 역사'라 말했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피해자들은 이러한 빨갱이 논란이 언론에 등장할 때마다 여전히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지목되는 표현이 빨갱이여서는 안된다. 사람은 결코 색깔로도 나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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