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70대 래퍼다

박정하 2023. 11. 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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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암에 걸렸어', '억장이 무너져' 발표한 래퍼 김찬늘그니 이야기

지난 3월 김찬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10월이 돼서야 그에게 완성된 원고를 전했습니다. "끝내준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치인 저를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김찬의 기다림입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마지막이라는 감각이 절망이 아닌 용기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기자말>

[박정하 기자]

▲ '암에 걸렸어' 뮤직비디오 스틸컷  랩하는 김찬의 모습
ⓒ 박찬홍
김찬(1954)은 대한민국 70대 래퍼다. 세상에 하나뿐인 딸에게 마음을 전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본 오디션 프로에서 어떤 랩을 듣게 된다. 구질구질한 편지보다 리듬에 맞춘 짧은 문장이 간결하니 좋게 느껴졌다. 곧바로 랩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마음 바닥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10년도 넘은 고민의 마침표를 직감했다.  

지체 없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랩 연습에 몰두했다. 몸 안에서 암이 자라나고 있는 줄 모른 채. 지난 역경에 비하면 암은 비교적 심플한 문제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암을 랩으로 승화시켜 2023년 1월 10일, '나 암에 걸렸어'를 발매했다. 랩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치른 일이다.  

꽃봉오리가 피지 않은 이른 봄, 김찬의 뮤직비디오는 그의 딸보다 고작 3살 어린 나 박정하(1995)를 멈춰 세웠다. "내 딸아 떨지 마 아빤 날개 펼친다" 비니와 선글라스를 쓴 70대 래퍼의 외침. 한순간의 볼거리로 간주할 수 없었다. 그의 주변으로 이야기가 흘러넘쳤다. 무작정 뮤직비디오 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와 만나게 해달라고.
 

방구석에서 시작된 랩 
 
▲ 김찬의 집에서 두 번째 만남 인터뷰 이후 사진 촬영을 위해 김찬의 집을 방문했다.
ⓒ 박정하
 
김찬은 운전보다 상대적으로 두 손이 자유로운 지하철을 애용한다. 이동 시간에도 랩 연습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선 헤드폰으로 귀를 덮은 채 몸을 들썩이다 눈에 띄는 할아버지가 됐다. 

"경로석에 딱 앉자마자 랩을 들어요.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나 봐. 발은 계속 까닥 거리지. 앞에 선 젊은이가 힐끔 쳐다보더니 옆으로 가더라고요."

일평생 그에게 음악이란 1. 교과목에 포함된 음악 수업 2.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 단 2개뿐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풍류대장'에서 최예림의 랩을 듣기 전까지 음악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그는 자신 역시 생각지 못한 전개라 말한다. 

"난 랩 그러면 젊은 애들이 나와서 욕하고 안 좋은 건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 랩을 듣자마자 가슴이 막 울렁거리는 거야."

색안경이 벗겨지자, 내면의 광활한 말들을 전하기에 랩만 한 게 없단 걸 깨달았다.

"공부해 보니까 한 박자에 네 글자 기준으로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엑셀로 표를 만들어서 거기에 글자를 짚어 넣기 시작한 거야. 네 마디에 12자 안 넘어가게."

누군가에게 유튜브는 좋은 선생님이 된다. 서너 달 동안 유튜브에 올라온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 박자 맞추기 연습을 했지만, 랩을 뱉는 속속 어긋났다. 도움이 필요했다.  

"랩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주변에 광고를 냈어요. 그랬더니 내 후배가 조카를 소개해 준 거야. 조카가 고등학교 2학년이야. 내가 쓴 가사를 보여주면서 '네가 먼저 불러 주면, 내가 그걸 따라 부르겠다'고 했어요." 
  
▲ 혼자 랩 연습을 하는 교회 김찬은 소리를 질러도 상관없는 텅 빈 교회 안에서 랩 연습을 한다.
ⓒ 박정하
 
그는 텅 빈 교회에서 소리를 지르며 랩 연습을 했다. 혓바닥이 꼬이긴 마찬가지. 여기서 기권표를 던질 김찬이 아니다. 주저 없이 독학과의 이별을 선언. 학원을 찾아 등록했다.  

의무감으로 가르치기에는 욕심 많은 학생이었다. 요번에는 선생님이 그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두드러진 변화 없이 3개월의 커리큘럼이 끝나고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그가 가진 기술 중 최고는 일이 되게 만드는 '근성'이라는 점이다. 처량한 신세로 학원을 기웃거리다 기회를 덥석 물었다. 

"수강생이 어린 친구도 있고, 고등학생도 있고, 대학생도 있고, 성인반도 있는데 보통 조금 하다 말거든요. 그런데 아버님을 보니까 열정이 확 생기더라고요." (정민혁, 현역 래퍼이자 김찬의 스승)
  
▲ 김찬의 랩 레슨 장소 김찬의 랩 스승 정민혁(왼쪽)과 동료(가운데) 그리고 김찬(오른쪽). 지하 녹음실 안의 냉기로 3월에도 손난로를 사용하고 있다.
ⓒ 박정하
 
김찬의 랩 인생에 전환 포인트를 들고 온 사람. 그를 만나고 이전 것들은 완전히 잊기로 한다. 김찬과 정민혁은 매주 수요일을 랩 레슨 날로 정하고, 둘만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두 남자의 호흡에서 눈여겨볼 것은 아래 7가지 항목이다. 

1. 에세이 : 김찬은 마음속 이야기를 에세이로 작성한다. 
2. 주제 정하기 : 에세이를 읽은 정민혁과 함께 곡의 주제를 정한다. 
3. 작곡 : 정민혁이 곡 주제와 (작곡가 동생들과 함께) 어울리는 비트를 만든다.
4. 랩 메이킹 : 정형화시킨 가사를 비트에 맞춰 랩 메이킹을 한다. 
5. 가이드 녹음 : 랩 메이킹이 완성되면, 김찬의 청각적 악보가 될 가이드를 녹음한다. 
6. 트레이닝 : 김찬은 가이드를 듣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7. 녹음 : 음원에 필요한 녹음을 진행한다. 
  
현역 래퍼이자 김찬의 스승인 정민혁은 혜성처럼 나타나 랩 레슨 외에 작곡과 녹음, 뮤직비디오 제작까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모든 인프라를 제공했다. 성장을 위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김찬의 응어리를 사이다처럼 뚫어 주었다. 

"존경스러운 것 중 하나가 저 나이에 어떻게 내 감수성을 그대로 녹여내는지 깜짝깜짝 놀라요."

드디어 그의 랩에 시동이 걸렸다. 한 발 한 발 가벼운 발걸음. 희망으로 가는 길. 별안간 암에 걸렸다. 시원 섭섭하다 말했지만,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두 편의 이별 
  
▲ 김찬의 집 근처 공원에서 김찬은 뿌리를 드러낼 만큼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 들려주었다.
ⓒ 박정하
 
"암 병동에서 집사람이 2년간 암 투병하다가 하늘나라로 갔잖아요. 같은 자리에 내가 누워있는 거야.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는 줄 알았어요." 

김찬은 딸이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암으로 아내를 잃어야 했다. 당시 중국 진출이란 꿈을 품고 무작정 중국으로 날아가 꿈과 좌절 속에서 6년을 보낸 후, 전부 헤아릴 수도 없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온갖 고생 끝에 시작한 사업이 상상 이상으로 덩치가 커지자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오로지 앞만 보고 살아왔거든. 옆에는 안 봤어."

부모에게는 제 맘대로 살아온 아들. 아내에게는 무심한 남편. 자식에게는 이기적인 아빠. 몸에서 가시지 않는 죄의 냄새. 어린 딸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줄 자신이 없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중국 친구가 김찬에게 제안한다. "그러지 말고, 딸을 나한테 보내. 내 딸처럼 키워줄게." 친구는 사업 초기부터 그와 함께한 피 한 방울 안 섞인 혈족과 같았다. 딸은 그렇게 그의 품에서 저 멀리 호주로 건너가게 된다.

아들은 중국으로 데려와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도록 했다. 연극 영화과 출신인 아들이 알바를 전전하며 사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이별 후 제자리를 찾아가는 사이 또 한 번의 잔혹한 이별이 찾아온다. 

"인생이 종이 한 장 같다고 생각했어요. 구겨지면 그만인데..."

중국에서 제 짝을 만나 결혼하겠다던 아들이 갑작스레 죽었다. 사인은 원인불명 돌연사.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따질 세 없이 피붙이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아내와 아들이 떠나도 끝끝내 떠오르는 해. 매일 아침 온몸에서 슬픔이 새어 나왔다. 텅 빈 방 안에서 혼자 죽기를 기다렸다. "내가 죽으면, 혼자 남은 딸은 어쩌지…?"

역경 속 피어난 꿈 
  
▲ 실제 녹음 장면 지하 녹음실에서 신곡 '억장이 무너져' 녹음을 진행하고 있다.
ⓒ 박정하
 
끝없이 비바람 맞고 살아온 70년 인생. 폭풍이 휘몰아친 후 그저 흐르는 시간에 떠돌다 랩에 눈을 뜨게 된다. 마지막 희망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는 선생님을 만났다. 마음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고, 전과 달리 생생해졌다. 신나게 랩을 배우던 중 암에 걸렸다. "이것 역시 내가 감당할 몫이구나…"

김찬은 암 수술 후 회복 기간 동안 가사를 써 내려갔다. '이 세상은 쓰고 달고 맵고 짜고 시고 아주 그냥 별난 맛. 단순하게 즐기고 싶어 무거운 짐을 내려놔' 하나 남은 딸에게 남기는 유서로서의 랩. 

"중국어로 '니'는 너라는 뜻이잖아요. 김찬은 늘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을 담아 활동명을 '김찬늘그니'로 정했어요."

그의 스승 정민혁은 랩메이킹에 반전을 주어 김찬이 지닌 삶의 무게를 진솔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암에 걸렸어'다. 녹음 당일 김찬이 보인 열정은 모두에게 울림으로 다가왔다. 

"보통 현역들도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녹음하면 사실 지치거든요. 근데 아버님께서 첫날 7시간을 녹음하셨어요." - 정민혁, 현역 래퍼이자 김찬의 스승

자신감이 붙자,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힘을 모아 현실의 어려움에서 절망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풍우', 부조리를 꾸짖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은 '억장이 무너져' 2곡을 연달아 발매했다. 그의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진심이 에너지를 만들어요. 진심이 없으면 절대 에너지 안 나옵니다."

김찬의 인생을 듣고, 비로소 자명해진 나이 70에 랩을 하는 이유. 맨땅에 헤딩을 할 때에도, 젊음을 바쳐 이룬 사업을 내려놓을 때에도, 랩을 시작할 때에도 용기를 냈다. 삶은 수많은 용기의 집합체. 

랩을 향한 도전은 이전의 용기와 다른 무게를 지녔다. 그것은 바로 살고자 하는 '의지'이자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꿈이 있으면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도전이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는지 알 수 있다.

"래퍼로서 어떤 꿈을 가지고 계세요?" 김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웃으며, "중국 무대 위에서 중국어로 랩하는 순간을 상상한다"는 대답을 내놨다. 꿈은 그런 거다. 꿈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를 청춘으로 만든다. 김찬은 오늘도 열렬히 랩을 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꿈을 이룰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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