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흥행감독 노필, 61년 뛰어넘은 '색다른 시도'

김상목 2023. 11. 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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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붉은 장미의 추억>

[김상목 기자]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포스터 이미지
ⓒ (주)프로젝트42
 
무관심과 외면 때문에 유실된 '환상의 영화들'

중국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사건인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지속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거의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중이다. 특히 방대한 역사유물이 봉건잔재라는 터무니없는 누명 하에 홍위병에 의해 집단적으로 파괴되면서 역사학은 물론 그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 연구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쳐 중국은 지금도 과학기술에 비해 문화 콘텐츠와 소프트 파워에 취약점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오죽하면 중국사 관련 당나라 연구는 일본, 송나라 연구는 베트남, 원나라 연구는 몽골, 명나라 연구는 한국, 청나라 연구는 대만으로 유학을 가야하는 지경이라니 덧붙일 게 더 있을까.

하지만 남의 일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 역시 그런 후과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 일제강점기 말기나 한국전쟁 시기 유실된 건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공적 보호와 관리의 부재로 인해 상실된 작품이 적지 않다. 심지어 1980년대 작품까지도 국가차원의 기록과 관리 소홀로 망가진 사례가 적지 않다. 검열로 가위질 당한 건 물론이거니와 상당수의 영화 필름이 밀짚모자에 두르는 띠 대용으로 재활용(?)되는 바람에 사라져버렸다는 괴담 같은 이야기가 횡행할 정도다. 그렇게 사라진 영화가 어쩌다 해외 수집가의 창고 한 구석에서 발견되는 경우에는 뉴스거리로 오르내린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일종의 '도시전설'처럼 김정일의 영화 컬렉션이 호사가들에게 언급되곤 한다. 영화 애호가로 알려진 김정일이 생전 온갖 수단을 사용해 수집한 영화 목록이 남북교류로 인해 개방되면 한국영화사 연구에 획기적 진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웃지도 울기도 뭐한 기대감의 발로다. 그렇게 공적 문화정책의 부재와 열악한 사회적 관심 탓에 '환상의 영화'가 되고만 작품이 적지 않다. 후대 영화사 연구자들로선 대강의 줄거리나 당대 언론보도로만 추리하듯 상상할 수 있거나 그나마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된 벌레 먹은 시나리오라도 남아 있다면 머릿속에 떠올려볼 뿐이다.

당대의 인기흥행작이라도 의외가 아니다. 김기영 감독의 1955년 작품 <양산도>나 1963년 작품 <고려장>,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작품 <만추> 같은 걸작으로 칭송되는 영화들 또한 전부(<만추>) 혹은 일부(<양산도>와 <고려장>) 유실로 영영 원래의 버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오죽하면 '김정일 컬렉션'에 마지막 기대를 거는 연구자들이 나오겠는가. 1950~1960년대 흥행감독 반열에 속했던 '노필'이란 이름도 기록 보존의 난맥으로 안타깝게 잊힌 이름 중 하나다.

61년의 시간 뛰어넘어 분출한 배우들의 연기 혼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스틸 이미지
ⓒ (주)프로젝트42
 
(아마도 코로나19로 인한) 무 관객 연극 공연 리허설 현장. 조연출과 배우들이 무대에 모여 있지만 예술 감독은 나타나지 않는다. 배우와 조연출은 함께 시나리오에 따라 연습해 보지만 대사가 낯설다며 몇몇은 불만을 터뜨린다. 아무리 관객 없이 온라인 송출될 공연이라지만 이렇게 맥이 빠진 상태로 과연 공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화면을 보던 관객이 염려해야 할 만큼 상황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어차피 온라인으로 누가 연극을 집중력 있게 보겠냐며 자조하는 배우들, 적당히 하고 끝내자며 푸념하는 배우들, 그래도 연기자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배우들로 뒤죽박죽인 무대다.

그 순간 누군가가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일행은 소식이 닿지 않던 예술 감독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기운을 내 리허설에 돌입할 준비를 한다. 배우 중 일부가 시나리오의 대사 문장이 어색하다며 문의하자 홀연히 출현한 그는 원래 1962년 노필 감독의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시나리오를 무대에 올리는 것이니만큼 61년 전 고전영화에서 구사되던 구어체로 발성하기를 권한다. 미심쩍어 하면서도 배우들이 발성법을 변경하자 신통방통하게 어색하던 대사가 단번에 교정된다. 이제 고전한국영화 시나리오를 무대에서 재연하려는 배우들의 본격 리허설이 시작된다.

주인공 '성철'은 카바레 악단에서 연주하는 악사다. 그는 형의 후원으로 음악대학을 다녔지만 자신의 형이 밀수 등 부도덕한 일로 돈벌이한다는 것을 알고 학업을 포기한 상태다. 그에겐 카바레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연인 '현주'와 웨이터인 친구 '허민'이 있다. 허민과 술을 마신 다음날, 형사들에 의해 성철은 체포된다. 전날 밤 그의 형 '성구'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친구인 허민은 성철이 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찾아가서 담판을 짓겠다고 했다는 진술을 했고 용의자로 성철은 살인범 혐의를 뒤집어쓴다. 억울한 성철은 탈옥해 진실을 밝히고 형의 원수를 갚기로 한다. 한편 카바레 지배인은 수상쩍은 기미를 보인다.

한국고전영화를 우연히 접하게 되면 느끼는 과장된 표정과 어조, 권선징악과 신파가 어우러져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공연 현장이지만 반세기도 전의 설정이건만 아주 낯설거나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강제로 이별당하고 이산된 가족의 이야기, 돈 때문에 타락해가는 군상들, 권위주의적 억압에 익숙해진 국가기구의 폭력이 인상적인 음악과 효과음에 의해 진한 감정으로 상상의 관객에게 전해져오고, 무대 뒤에서 자신이 꿈꾸던 비전이 구현되는 흥분을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 감독의 얼굴에는 시시각각 희로애락이 엄습해온다.
 
'영화의 유령' 소환하는 엄숙한 제의로 변모한 공연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스틸 이미지
ⓒ (주)프로젝트42
 
인터넷 여기저기에 원작 영화를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영화가 존재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불완전한 필름이나마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아날로그 원본 자체가 부재한 걸 온라인에서 찾을 리 만무한 일이다. 그저 파악할 수 있었던 건 대강의 시놉시스와 함께 감독 노필이 1929년에 태어나 1940년대 말부터 영화를 만들었고 1950~1960년대 인기감독으로 다수의 흥행작을 만들었지만 1966년에 제작과정에서 짊어진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37살의 생을 마감했다는 것에 불과하다. 영화의 짧은 영상 클립은커녕, 그 흔한 포스터나 스틸 컷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관객은 연극 공연의 리허설에 홀연히 등장한, 무대에 있던 모두가 예술 감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의 정체에 의문을 품을 법하다. 실제로 그의 정체는 리허설이,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공연이 끝난 후 배우와 스태프들이, 그리고 화면을 지켜보던 관객들의 물음표가 남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무대의 연기자들이 처음에 반신반의하다 점점 시나리오에 몰입해가면서 마치 1962년 영화 그 자체에 빙의되는 것처럼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화면은 컬러에서 흑백 톤으로 전환된다.

그 순간을 전후해 그저 과거에 유실된 영화의 시나리오를 낭독극 형식으로 읽으며 간단한 추임새를 취하던 배우들은 어느새 격정적인 동작과 빨려들게 만들 듯한 치켜뜬 눈빛(마치 춘사 나운규가 <아리랑> 스틸 컷에서 보여줬던 형형한 그런 느낌의)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배역에 몰입해 마치 1962년에 공개되었으나 사라지고 만 영화가 실제로 남아 있다면 이런 줄거리로 진행되었겠구나 하는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비록 연극 무대에서 대사 낭독으로만 전개되지만 어느 순간 총소리나 사이렌 소음마저 단순한 청각적 효과음을 넘어 마치 실제 눈앞에서 액션 장면이 펼쳐지듯 기묘한 감각을 자아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예술 감독이라 멋대로 상상하던 그 남자는 결정적 순간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이 고인 표정을 숨길 기색도 없이 화면을 응시하는 관객들 앞에 드러낸다. 대단원의 말미에 마치 배우들의 사연에 하늘이 눈물로 반응하듯 무대 주변의 인공폭포가 거센 물살을 뿜어댄다. 다시 컬러로 화면이 바뀌고 무대 위의 배우와 스태프들은 몰입했던 공연의 감동에 빠져 있지만 그중 누군가는 사라진 상태다. 이윽고 나머지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위기 넘어서는 실험과 도전, 독립영화는 죽지 않는다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 스틸 이미지
ⓒ (주)프로젝트42
 
<붉은 장미의 추억>은 극중극 형식을 통해 두 개의 난관을 돌파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극중 설정인 (코로나19로 추정되는 악재 때문에) 대면 공연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언택트+온라인' 공연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고충이다. 관객의 표정과 탄성을 포함한 즉각적 피드백을 생명으로 여기던 연극 공연이 처하고 만 미증유의 난관 앞에서 어떻게든 공연을 펼쳐내야 하는 이들의 고충이 전면적으로 펼쳐진다. 두 번째는 그들이 소화해야 할 시나리오의 난맥상이다. 그런 영화가 존재했다는 것만 회자될 뿐, 누구도 본 적도, 참고할 무엇인가도 없는 이제는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낯선 옛날 영화를 어떻게 동시대적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화두에 오른다.

영화는 이 둘을 교차시켜내며 과거의 감독과 배우들의 유령을 소환하고 그 유령들로 하여금 현실에서 위기에 처한 배우와 스태프들을 돕도록 파견한다. 물론 그런 지원과정에서 유령은 자신이 못다 이룬 한 혹은 기억되고픈 욕망을 약간이나마 충족하게 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의 유령 혹은 변방의 존재들은 서로를 돕고 협력하며 위로를 주고받는다. 그런 비전이 <붉은 장미의 추억> 낭독극을 시연하는 영화 속 배우들, 그리고 화면 바깥에서 이 영화를 작업한 감독과 스태프들에 의해 동시성으로 완결되는 구조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한국영화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와 그 틈새로 사라져 기억에서 휘발된 선배들을 호출하고자 한다. 영화로 리메이크하기엔 너무 부담이 크고 준비할 게 만만하지 않은 현실 여건에서 시각적 재현을 통해 불충분하나마 과거의 비전을 상상하게 만들고 혹시 모를 추가 기회를 모색하려는 발로일 테다. 그와 함께 전대미문의 역병으로 인해 개점휴업 상태에 빠져 생계는 물론 연기활동의 단절에 봉착한 연기자들에게 작은 여지라도 제공하려는 실용적 태도의 귀결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 한국영화사의 유실된 시간과 물질성을 관객이 체감하게 되는 건 덤이다.

코로나19 시기에 공연활동 중단에 따른 타개책으로 다양한 도전이 시도되었고 일정한 실험이 축적되었지만, <붉은 장미의 추억>은 단순히 대면 공연이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는 목적성을 넘어 영화의 역사와 고전영화에 대한 헌사라는 색다른 시도를 추가하는 흥미로운 변주일 것이다. 그래서 이 낭독극의 영상화 버전은 극장 스크린을 통해서 봐도 제법 근사하지만, (일부 영화제에서 시도되었던) 실제 무대 라이브 실황공연으로 감상한다면 더 창작의도에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개봉과 함께 무대 공연이 병행된다면 한번쯤 비교체험해보고 싶은 실험이다. 2022년, 연극배우들의 극중극 형식을 담아 개봉했던 <역할들>에선 제작을 맡았던 백재호 감독 겸 PD의 연출작이다.
 
<작품정보>
붉은 장미의 추억 Though the Rose has Withered
2021|한국|드라마
2023.11.02. 개봉|62분|12세 관람가
공연연출 문삼화
감독/PD 백재호
출연 김영민, 김지원, 배우경, 이인석, 유다온, 남기욱,
      정다연, 김태완, 김세중, 위다은
원작 노필 '붉은 장미의 추억(1962)'
기획 (재)중랑문화재단
제작 (주)프로젝트42, 어처구니 프로젝트, (주)엠엔씨에프
배급 (주)프로젝트42
 
2022 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스트레인지 오마쥬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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